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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8(2); 2019 > Article
“한민족의 뿌리”를 말하는 의사들: 의학 유전학과 한국인 기원론, 1975-1987

Abstract

Anthropological genetics emerged as a new discipline to investigate the origin of human species in the second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Using the genetic database of blood groups and other protein polymorphisms, anthropological geneticists started redrawing the ancient migratory history of human populations. A peculiarity of the Korean experience is that clinical physicians were the first experts using genetic data to theorize the historical origin of the respective population. This paper examines how South Korean physicians produced the genetic knowledge and discourse of the Korean origin in the 1970s and 1980s. It argues that transnational scientific exchange led clinical researchers to engage in global anthropological studies. The paper focuses on two scientific cooperative cases in medical genetics at the time: the West German-South Korean pharmacogenetic research on the Korean population and the Asia-Oceania Histocompatibility Workshop. At the outset, physicians introduced medical genetics into their laboratory for clinical applications. Involved in cooperative projects on investigating anthropological implications of their clinical work, medical researchers came to use their genetic data for studying the Korean origin. In the process, physicians simply followed a nationalist narrative of the Korean origin rather than criticizing it. This was partially due to their lack of serious interest in anthropological work. Their explanations about the Korean origin would be considered “scientific” while hiding their embracing of the nationalist narrative.

1. 머리말

  • 韓民族의 뿌리는 北蒙古계통. 우리 민족은 어떻게 생성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을까. 서울의대 李弘揆 교수(내과)는 한국에서는 최초로 유전학을 통해 한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논문을 무크誌 <한민족>에 발표,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李교수는 북몽고인의 유전적 특성은 조와 밀 등 잡곡을 오랫동안 상식해온 점이라면서 쌀을 주식으로 한 현재의 식생활은 한국인 체질과 상이하다고 밝혔다. 고혈압과 당뇨병 등 식원병이 늘어가는 현대 질병의 유형도 이러한 근거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코카시안은 한국인보다 인슐린 의존형 당뇨병 발생률이 75배나 높다. 李교수는 또 술을 마셔 얼굴이 붉어지는 형이 아시아 사람에게는 2~3명에 한명 꼴인데 코카시안에는 1백명당 1명 정도로 인종차를 보이고 있다며 “한민족의 뿌리는 인류유전학적으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1].

지구사적 맥락에서 한국에서의 유전 과학과 민족 정체성의 역사가 흥미로운 점은 유전학적 도구를 사용하여 한민족의 기원을 본격적으로 말하던 지식인들이 인류학자도, 유전학자도 아닌 의사들이었다는 사실이다[2]. 물론 인종의 분류와 기원을 설명하는 체질 인류학이 해부학교실의 해부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종족의 혈액형이나 지문 분포에 대한 인류학적 응용이 법의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이던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 기초 의학자들이 조선인의 기원에 대해 과학적으로 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3]. 다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일본에서건 구미에서건 의학부 소속과는 상관없이 각 종족 집단의 기원을 유전학적으로 탐구하는 학자들은 스스로를 인류 유전학자 내지 분자 인류학자로 정의하고 이에 헌신한 반면, 1970년대 이후 한국에서 한국인의 기원에 대해 논의한 의사들의 전문성은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임상병리과, 미생물학과 등 다양한 의학 분야에 걸쳐 있었다[4]. 이들은 오롯이 인류학적 주제에 천착하는 대신 이를 다룰 때에도 임상적 관심을 유지했다[5]. 이런 한국의 사례는 2차 대전 이후 집단 유전학의 역사를 살피는데 중요한 길잡이가 되어온 커쉬(Nurit Kirsh)의 유전학 분류에 따라 살펴볼 때 매우 흥미롭다. 전후 이스라엘의 집단 유전학 연구 경향을 추적한 커쉬는 유대인에 관한 유전학 연구가 유대인 집단의 유전적 특성을 탐구하려는 집단 유전학 지향(population-oriented) 연구와 유전적 특성이 가져오는 의학적 문제에 주목하는 유전의학적 지향(genetic/medical-oriented) 연구라는 두 경향을 가진 분야의 연구자들로 구별된다고 보고했다(Kirsh, 2003). 커쉬의 분류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한국인의 뿌리”를 말하는 의사들은 일정 부분 유전의학적 지향 연구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유전의학적 지향 연구자들과 달리 한국인의 기원에 대한 담론을 생산하는데 적극 참여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본 논문은 한국에서 의학 유전학이 연구 분야로 등장하고 제도화되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 사이에 의학 유전학 연구자들이 한국인의 기원과 관련된 유전학적 자료와 지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추적한다. 특히 이 글은 의학 유전학자들이 한국인 기원에 관한 지식과 담론들을 생산하게 되는 중요한 배경으로 유전학적 지식에 대한 임상적 요구가 증대되던 국내적 맥락과 1960년대 이후 팽창하던 국제 과학 협력 연구라는 지구적 맥락을 살핀다. 의사들은 임산부의 몸이 사회적 통제의 대상으로 부상하는 가운데 산전진단검사 등을 도입하면서 한국인 집단에 대한 유전학적 자료를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인류 집단의 기원 등에 관심을 가진 국외 과학자와의 국제 협력 및 공동 연구협의체에의 참여는 의학 유전학자들이 이처럼 임상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지식들을 인류학적 목적을 위한 연구 자원으로 활용하도록 이끌었다[6]. 본 논문은 국제 협력 연구 협의체를 비롯한 다양한 초국적 연구 네트워크들이 출현하는 와중에 개별 의학 연구자들이 자신들이 직면한 학문 정치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초국적 네트워크에 접맥했으며, 그 부산물로 한국인 기원론에 관한 ‘과학적’ 논의들을 생산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먼저 한국에서 의학 유전학과 관련된 연구 학회와 기관의 설립이 임산부와 태아가 국가의 보건 관리 대상으로 자리하는 가운데 유전자 검사의 임상적 중요성이 강조되는 맥락에서 등장했음을 확인한다. 다음으로 이런 유전자 검사의 필요성 때문에 한양의대 유전학교실에 임용된 집단 유전학자 백용균이 자신의 의학적 권위의 확보와 집단 유전학적 관심을 유지할 방안으로 독일의 약물 유전학자들과의 협력 연구를 추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독일 연구자들을 좇아 의학 유전학 자료를 인류 집단의 기원과 관련한 것으로 해석했음을 살핀다. 이어서 장기 이식 및 질병 연관과 관련해 한국인 집단의 인간백혈구항원(Human Leukocyte Antigen, HLA) 다형성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 의학자들이 관련 국제 과학 연구 협의체에 참여하려는 노력 속에서 동아시아인 집단의 이주와 기원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사들의 “한국인의 뿌리”에 대한 설명이 동시대의 체질 인류학자들이나 유전학자들 같은 ‘자연과학’ 동료들과 어떤 점에서 구별되고 어느 지점에서 공명하는지, 그리고 고고학과 같은 ‘인문학’ 연구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하는지를 논한다. 이 과정에서 의사들의 ‘과학적’ 말하기가 당시 팽배한 종족 민족주의의 자장 가운데 한민족의 기원에 관한 보다 대중적인 담론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다룰 것이다.

2. 한국의 의학 유전학: 진단검사로서의 “유전의학”

한국에서 임상의들은 염색체 이상을 관찰하는 세포유전학적 도구들을 산전진단검사로 본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 1970년대부터 유전학적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주로 산부인과의와 소아과의들, 그리고 소수의 내과의들이 임상으로 연구 기법을 도입하고 염색체 이상으로 인한 기형아 증례를 보고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에서 의학 유전학이 자리를 잡았다고 말할 수 있다.
임상의들은 국가가 “유전적 장애”와 관련해 산모의 출산에 대한 의학적 개입 가능성을 법제화하고, “정박아”(정신박약아)가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던 맥락에서 이런 세포유전학 도구들을 병원으로 도입했다. 1972년에 출범한 유신 정권은 이듬해 1월 30일에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던 「모자보건법」을 비상국무회의를 통해 통과시켰다. 공포 당시 보건사회부는 이 법안의 제안 이유를 “건전한 자녀의 출산과 발육을 도모하여 국민보건향상에 기여함과 동시에 국가가 추진하는 가족계획 사업을 일층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명시했다. 이와 함께 “인공임신 중절수술의 허용한계”로 “우생학적 또는 유전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형사법의 낙태죄에 대한 처벌 없이 중절 수술을 수행하도록 허용한다고 규정했다[7]. “가족계획 사업”에 대한 서술이 보여주듯 이는 당시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법적 장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생학적 또는 유전적 정신장애”란 진술이 강조하는 것처럼 “사회적 부적격자”(social unfit)에 대한 원천적 차단을 목적으로 한 우생학적 법안의 성격 또한 갖고 있었다[8]. 이는 바꿔 말해 인구의 “양” 뿐만 아니라 “질” 또한 관리가 가능한 법제화였다.
한편, 1965년 한국인 원폭 피폭자 조사 이래 이들 자손들의 “기형아” 출산가능성은 주요한 고민거리로 떠올랐다. 유사한 우려 가운데 “정박아” 역시 사회 문제로 부상했다[9]. 1968년 정박아에 대한 첫 통계 조사 이후 약 38만 7천명, 당시 전체 아동 인구의 3% 가량이 정박아로 추산되었고, 정부가 제공하는 유일한 “수용 시설”은 국립각심학원(현 국립재활원)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은 특수교육이 마련되지 않으면 이들이 “성인이 된 후 거리의 방랑아나 윤락녀, 심하면 범죄에 발을 붙이게 되고 결국은 사회의 골칫거리로 재등장하게 마련”이라고 경고했다. “이미 윤락녀의 대부분이 저IQ를 갖고 있다는 것이 판명된 이상 그대로 방치해둘수만도 없는 문제”로, 당시 언론은 대대적인 관리 없이는 정박아가 “사회의 골칫거리”가 될 것임을 당연시하며 정부의 개입을 촉구했다[10]. 이런 상황 속에서 1971년 정부는 아동복리사업의 예산 대부분을 특수아동보호사업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정박아”를 포함한 지체부자유아에게 투자한다고 선언했다[11]. 이와 함께 사설 정박아 교육기관들도 개교했다[12]. 당시 유신 정권은 중학교 무시험 입학을 비롯한 평준화 정책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입학한 정박아들이 중학교 교육을 파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13]. 이에 1973년 문교부는 중학교 교육 “정상화” 방안으로 “IQ 75 이하”의 “정박아” 및 “지진아”의 중학교 진학을 억제하는 방침을 제시했다[14]. 유전적 정신장애에 대한 임신 중절을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은 이렇게 사회 문제로 떠오른 정박아를 해결할 수 있는 법제였다. 실제로 1969년 당시 국립각심학원에서 근무하던 임백인과 연세의대의 윤종식, 안재영은 국립각심원을 대상으로 한 염색체 이상 조사를 통해 “우리나라 정신박약아 중 37%가 유전”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 보고했다. 이들은 이런 “악성인자”를 “제거시키려면 국민우생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모자보건법」은 정박아에 대한 우생학적 우려를 일소시킬만한 조치였다[15].
「모자보건법」이 제시한 정박아에 대한 우생학적 이상은 선천성 유전 질환을 탐지할 수 있는 의학적 기술과 제도를 통해서만 구현 가능했다. 당시 의학 유전학은 임상 진단에 활용 가능한 세포유전학 기술들의 발전에 힘입어 인종위생의 “사생아”에서 생의학의 최전선에 위치한 학문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Lindee, 2002). 1950년대 후반부터 세포배양기술, 핵형조사법(karyotyping), 고배율 전자현미경과 같은 테크닉과 도구들이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1960년대 말부터 의사들은 처음으로 태아의 염색체 이상과 대사 질환을 진단할 수 있게 되었다. 1959년 프랑스의 마흐타 고티에(Martha Gauthier)와 제롬 르쥔(Jerome Lejeune)은 다운 증후군이 21번의 삼염색체성(trisomy 21)에 유발됨을, 같은 해 찰스 포드(Charles Ford)와 폴 폴라니(Paul Polani) 등은 생식샘 발달장애를 보이는 터너 증후군이 여성의 X 염색체의 결손 혹은 구조적 이상에 의해 일어난다는 점을 발견했다. 페트리샤 제이콥스(Patricia Jacobs)와 동료들은 클라인펠터 증후군이 남성에게서 X 염색체가 하나 더 있을 경우 발생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연구들과 함께 양수천자기법은 양수에서 부유하는 태아 세포의 염색체 이수성을 진단할 수 있게 만들었다. 1970년대 들어서 새로이 발전한 염색체 밴딩 기법은 판별 가능한 염색체 이상의 수를 늘렸다(Löwy, 2014). 「모자보건법」 제정 이후 산부인과 및 소아과 의사들은 이렇게 새로이 등장하는 산전진단검사를 습득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산전진단검사 도입을 이끈 선구자 중 한명인 경희의대 산부인과교실의 주갑순은 훗날 “기형아는 국가적 소실”이라며 자신이 기형아를 판별하는 세포유전학에 헌신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는데, 이는 한국의학 유전학의 출발과 「모자보건법」과의 관계의 상관성을 보여주는 한 가지 단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6].
1960년대만 하더라도 염색체의 핵형 분석 기술을 가진 연구 기관은 서울대 동물학과 강영선의 세포학 연구실뿐이었다. 따라서 의학 연구자들이 염색체 이상 질환 증례를 처음으로 보고할 때 강영선 연구실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최흥재, 고운희, 1966) [17]. 1970년대 중반 젊은 의학자들이 미국이나 독일의 의과대학에서 세포유전학을 수련하고 돌아오면서부터 의학자들이 독자적으로 염색체 검사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1976년에는 경희의대 주갑순이 존스홉킨스의대 산부인과에서 양수천자 검사를 익히고 귀국한 뒤 임상진료를 위한 세포유전학 기법 동향에 대해 소개했고, 이듬해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양수천자 검사 증례를 보고했다(주갑순, 1976; 한종설, 목정은, 주갑순, 1977). 연세의대에서는 부속병원 산부인과에 1974년부터 유전학연구실이 설치되어 산전진단용으로 염색체검사를 실시했으며, 1978년도부터 독일 뮌스터의대에서 세포유전학을 수련하고 귀국한 양영호가 1979년부터 터너 증후군을 비롯한 염색체 이상 관련 질환에 대한 증례를 보고했다(양영호, 양재섭, 김진경, 1979). 광주기독병원에서는 소아과장 김기복이 1972년부터 약 일 년 동안 뉴욕 로체스터 대학 소아과교실에서 인체세포유전학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이후 1974년에 세포유전학 검사실을 창설하고 염색체검사를 실시했으며, 이듬해부터는 염색체 이상 소아 환자들에 대한 증례 검토에 착수했다(김기복, 이덕웅, 이광섭, 1975). 1975년 한양의대에서는 유전학교실이 대학원 과정으로 국내 최초로 개설되고, 유전학자 백용균이 주임교수로 부임하면서 염색체 검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의학 유전학자들이 관심을 갖던 임상 검사가 산전진단검사만으로 한정되지는 않았다. 서울의대의 경우 내과학교실의 최규완이 미시건 주립대 유전학과에서 블룸(David Bloom)의 지도를 받고 귀국한 후에 인구의학연구소 내의 유전자연구실을 수립한 뒤 전공의 특성대로 혈액이나 양수뿐만 아니라 골수를 포함한 염색체 핵형 분석을 시도했다. 그 결과 선천성 염색체 이상 유발 기형 환자 외에도 백혈병 환자 등 다른 질환을 가진 환자들 또한 조사했다(최규완, 김동순, 이영복, 1973) [18]. 4절에서 확인할 것과 같이 HLA 검사 또한 1980년대에 장기와 골수 이식이 임상에서 구현되면서 중요한 검사로 부상했다.
한편, 이 시기 의학 유전학에 관심을 가진 임상의들과 유전학자들 사이에서 전문성 및 연구 관심사와 관련한 일종의 긴장관계가 발견된다. 대개 동물학과 출신이던 유전학자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인류 유전 연구를 추진했으며, 그 일환으로 염색체 핵형 조사를 비롯한 한국인 집단에 대한 세포유전학적 연구를 실시해왔다(Hyun, 2017). 특히 임상 의학자들의 유전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1970년대 말 유전학자들의 주도로 한국유전학회가 창설되었고, 한양의대 유전학교실의 백용균이 초대회장을 맡았다(한국생물과학협회, 1996). 이 가운데 김기복, 양영호, 주갑순 등 의학 유전학의 초기 구성원들 일부는 백용균과 함께 한국유전학회를 연구 성과 교류의 플랫폼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자신들의 유전의학 지향이 당시 유전학자들이 추진하는 집단 유전학 연구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1981년 12월 임상검사와 관련한 세포유전학에만 관심 있는 의사들만이 참가할 수 있는 한국유전의학회(1983년 대한유전의학회, 1992년 대한의학유전학회 개명)를 수립했다. 당시 창립에 참여했던 의사들은 의학적 측면을 더 강조하기 위해 의학 유전학 대신 “유전의학”이라는 용어를 학회명에 사용했다(대한의학유전학회, 2011: 206).
1980년대 이후 임상병리과(현 진단검사의학) 의학자들이 혈액종양 염색체 검사에 참여하고 이에 대한 연구 성과들을 대한유전의학회에 보고함으로써 의학계 내부에서 의학 유전학의 저변은 확대되었지만, 동시에 해당 학문을 임상검사에 한정된 분야로 만들었다. 이런 전통 가운데 대한유전의학회는 훗날 유전자 검사실을 인증하고 관리하며, 한국유전자검사평가원을 수립하는 등 의료 기관에서의 유전자 검사 활동에만 초점을 맞춘 학술 단체로 발전할 것이었다.
이렇게 의학계 내부에서 의학 유전학이 임상 검사에 대한 관심으로 한정되어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유전의학 지향 의사들이 인류학적 용도로 한국인 집단의 유전적 데이터를 수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들이 내린 인류학적 결론은 무엇이고, 한국인의 기원을 탐구하는 고고학자 및 인류학자들의 연구들과는 어떠한 상호작용을 벌였을까? 한양의대 유전학교실의 백용균은 1980년대에 한국인 알코올민감성에 대한 약물 유전학 연구를 추진하며 한국인 집단의 알코올 대사 동질 효소 단백질의 다형성 자료를 만들어냈으며, 이것이 한국인의 기원을 추론하는데 이용 가능한 자료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를 한민족이 “단일민족”임을 암시하는 과학적 증거로 사용했다. 다른 한편에서 같은 시기에 서울의대 내과학교실 최규완을 비롯해 서울의대, 연세의대, 한양의대의 내과, 외과, 임상병리과 등의 의학 연구자들은 한국인 집단의 HLA 다형성 자료를 생산하면서 이를 동아시아인 집단 간의 인류학적 연관성과 기원 및 이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활용했다. 이 두 사례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의사들의 연구 방향의 ‘전환’ 과정과 그 결과 등장한 한국인 기원론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3. 약물 유전학 네트워크를 통한 백용균의 ‘전환’과 한국인 단일민족론

백용균은 1950년에 서울대 생물학과를 졸업했지만, 학부생으로 강영선의 지도를 받던 1949년에 이미 전남의대의 교수로 부임했었다. 1954년에 텍사스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의 윌슨 스톤(Wilson Stone) 밑에서 초파리 유전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후에는 전남의대에 항온실을 갖춘 한국 최초의 초파리 실험실을 구축했다[19]. 백용균은 국내의 야생 초파리 집단의 분류 및 유전적 변이 연구를 이끌었으며, 1960년부터는 연세대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초파리 집단 내 치사유전자 빈도에 관한 연구를 통해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의 소진화설을 지지하는 연구 성과를 냈다. 1970년에는 미국 하와이대 의대의 집단 유전학 강의 담당으로 취임했다가 종신재직권을 얻었으나, 1975년 한양대의 요청으로 한양대 의과대학에 유전학교실을 창설하면서 한양의대 교수로 부임했다(백용균박사기념사업회, 1991).
새로 꾸린 유전학교실에서 백용균은 임상 검사와 관련된 인류 유전 연구 분야에 새로이 발을 딛게 되었다. 백용균의 인류 유전 분야로의 이동은 생물학과 출신이던 그가 의과대학에 임용된 주요 이유인 유전상담을 비롯해 당시 임상에서 날로 요구가 커져가던 유전학적 진단을 실시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응한 결과였다. 당시 유전학교실의 실험실 전체 설계도에서 염색체 분석실과 유전상담실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는데, 이는 해당 교실의 창설 목적을 잘 보여준다(백용균박사기념사업회, 1991: 61). 또 한양대병원 유전상담실에서 염색체 검사와 유전상담을 받은 환자가 1980년 한 해에만 6,000명이 넘었다는 점은 당시의 수요를 짐작케 한다. 백용균은 나아가 제일병원과 차병원에 유전학 연구실이 개설된 이후 유전상담을 돕기 위한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백용균박사기념사업회, 1991: 69). 이런 이유로 유전학교실의 초기 논문들은 유전병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나 무월경 환자의 염색체 이상에 대한 관찰,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의 필라델피아 염색체 관찰, 원폭 피해자 및 자손의 염색체 이상 관찰, 정신질환자의 염색체 관찰, 자궁경부암 환자 세포의 자매염색분체 교환 빈도 관찰, 염색체 이상 의심 환자들에 대한 세포유전학적인 관찰과 같이 임상 목적의 염색체 검사 결과에 대한 증례 보고들로 채워졌다[20].
백용균은 동물학과 출신에 초파리 유전학을 연구한 경력 때문에 유전의학 지향 맥락에서 인간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집단 유전학 연구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한양의대에 부임하기 이전까지 백용균은 초파리 유전학자로서 꾸준히 한국동물학회에서 활동해 왔으며, 1978년 한국동물학회가 소속된 생물과학협회 산하에 한국유전학회가 창립하는 것을 주도하고, 유전학자들과의 교류 또한 어느 정도 유지했다. 예를 들어 서울대 동물학과 이정주 연구실과 충남대 생물학과 김영진 연구실은 인류 유전과 관련해 종종 한양의대 유전학교실과 공동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다만 백용균은 유전학자들이 추진한 “한국인 집단의 분자유전학적 연구”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연루되거나 참여하는 것에는 거리를 두었는데, 이런 거리 두기는 의과대학의 의학 유전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백용균과 그의 제자들은 한국유전의학회 학술대회에 꾸준히 참석하고 연구 결과 또한 발표했지만, 막상 백용균 자신은 이 의사 중심 유전학회에 가입하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묘한 입장을 보였다[21].
백용균이 집단 유전학자로서의 정체성과 의학 유전학을 수행해야 하는 직업적 요구의 간극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벌이던 가운데 이를 해소할 돌파구가 H. 베르너 괴데(H. Werner Goedde)와의 만남을 통해 마련되었다. 1983년 11월 서강대학교에서 제6회 한국유전학회 학술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서독 함부르크대학 인류유전학연구소 소장 괴데가 초청 강연을 진행했다[22]. 당시 괴데는 알코올 민감성과 관련된 약물 유전학 연구를 주도하는 인물이었으며,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종래 약물 유전학 연구들을 포괄하여 환경적, 독성학적 요인들이 유전 현상에 끼치는 역할과 상호작용을 모두 포착할 분야로서 생태유전학(ecogenetics)을 제안한 영향력 있는 연구자였다. 해당 강연에서 괴데는 알코올 민감성(홍조 현상)에 대한 자신의 약물 유전학 연구를 소개했다. 그는 알코올 대사 효소인 알코올 탈수소효소(alcohol dehydrogenase, ADH) 및 아세트알데히드 탈수소효소(acetaldehyde dehydrogenase, ALDH)의 동질 효소 중 ALDH2의 변이가 개인, 인종 집단 별로 다양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음주 반응에 대한 차이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이는 유전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며 최근 이 동질 효소들의 다형성을 채취한 모근 시료 등에서 분석할 수 있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동양인 집단”(the Oriental group)이 술을 적게 먹어도 홍조를 띠는 이유에 대해 유전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Goedde, 1983). 여기서 괴데가 한국인 집단에 대한 연구가 미비하다고 설명하자 백용균은 발표에 참석한 한양의대 학생들의 모근을 바로 채취해 그에게 분석을 요청했다(Goedde, Agarwal, and Paik, 1983).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괴데 연구팀과 공동 연구를 수행하기로 합의했고, 그 결과 한독 협력 프로젝트인 “한국인 집단의 생태유전학적, 집단 유전학적 연구”가 서독의 폭스바겐 재단의 지원을 받아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23].
한독 공동 연구 프로젝트는 2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첫 국면(1985-1987)에서는 한국인 집단의 적혈구 효소와 혈청 단백질의 다형성을 조사했다[24]. 등점전 전기영동을 비롯한 각종 단백질 다형성 분석 장비가 1985년 3월 한양의대 유전학교실에 배달된 이후 괴데 연구팀이 한양의대 유전학교실에 머무르면서 연구가 시작되었다(백용균박사기념사업회, 1991: 71). 이 한독 공동 연구팀은 한양대, 제주대, 충남대 학생의 말초혈을 활용하여 8종의 혈청단백질과 9종의 적혈구 효소와 약물 및 화학물질 해독과 관련한 4종의 효소, 그리고 6종의 혈액형의 유전적 분포 및 빈도 조사를 실시했다(백용균박사기념사업회, 1991: 71-72).
백용균 연구팀은 유전의학 지향성과 집단 유전학 지향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독특한 한국인 집단 연구를 수행했다. 먼저 한양의대 유전학교실 연구자들은 약물 유전학적 함의를 갖는 효소들의 다형성 및 유전적 빈도 분석을 수행하고, 이와 관련한 공중보건적 제언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델타-아미노불린산 효소의 다형성에 대한 분석은 한국인 가운데 납에 민감한 유전적 체질을 가진 사람의 비율을 추론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백용균이 괴데와 인연을 맺게된 ALDH 동질 효소 다형성 연구의 경우 알코올 중독에 대한 유전적 영향과 예방 캠페인 마련에 대한 의학 유전학적 제언을 가능하게 했다(백용균, 1991). 그는 1990년 대한정신약물학회에서 한국인 집단의 ALDH2 결핍다형 연구 결과를 “한국인의 28%는 술이 안받는 체질”이라고 설명하며 조사도구로 알코올 유전자 패치를 소개했다. 그의 설명과 알코올 패치는 이후 한국 정부가 알코올 중독 방지 및 절주 정책을 실시할 때 주요 슬로건과 건강증진 도구로 자리 잡았다[25].
이런 유전의학 지향성에도 불구하고, 백용균은 다른 한편으로 한국인 집단의 유전적 단일성과 중국인 및 일본인 집단과의 유전적 유사성과 같은 인류학적 주제들에 주목했다. 이와 관련된 연구에서 그는 한국인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문화적 요인과 같은 ‘비과학적’ 설명들을 그의 ‘과학적’ 논의에 끌고 들어왔다. 백용균은 1986년 9월 서독 베를린에서 열린 제7회 국제인류유전학회에 참석하여 공동 연구 결과의 일부를 발표했다(Paik, 1986). 여기서 우리는 그가 한국인 집단의 유전학적 연구 필요성에 대해 유전학 바깥의 한국인의 기원에 관한 주장들을 갖고 들어와 설명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한국인은 몽골인종에 속하지만, 언어와 관습은 근린 종족 집단들(ethnic groups)과 다르다. 흥미롭게도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단일민족(homogeneous race)이라고 부르지만, 민속학적으로는 남방의 폴리네시아 계통과 북방의 시베리아 계통이라는 두 지배적인 계통의 혼합(mixture)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신분제(cast system)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는 1910년 전까지 1,500년간의 확고한 신분제 덕분에 한 민족(race) 집단 내에서 각기 다른 사회적 집단들의 독립적 발전이 가능했다. 한국인에 대한 이러한 유전학적, 인류학적 흥밋거리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해 오직 약간의 논문들이 출판되었기에 우리는 여기서 (1) 서울의 산업지역, (2) 대전의 농촌지역(남한의 중앙), (3) 제주도(남한 최남단)에 거주하는 세 집단에 대해 연구했다. (Paik, 1986) [26]

백용균의 한국인의 “인종” 소속과 “민속학적” 설명 등은 1964년 고고학자 김정학이 『한국문화사대계』에 제출한 「한국민족형성사」를 참고하여 쓰여졌다. 다만 김정학은 해당 논문에서 한국민족이 퉁구스족, 고아세아족, 남방민족의 요소가 섞여있고 “중국민족과 일본민족” 등과 약간의 “혼혈”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극히 소수여서 “체질이나 언어에 변화를 가져올 정도는 못”된다고 주장했다. 김정학은 결론적으로 “한국민족은 시베리아 유래 북방민족 가운데 알타이족에 가장 가깝고 북방민족의 요소가 체질, 언어, 문화에 있어서 압도적”이라는 북방기원론을 주장했다(김정학, 1964). 백용균은 이런 전체적인 주장을 무시한 채 고고학자의 논의를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인용 및 발췌하여 한국인 집단 유전 연구가 왜 흥미로운지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했다.
한편 백용균은 이 글에서 한국인 집단에 대한 단백질 다형성에 대한 연구결과가 서울, 충남(남한의 중앙), 제주(남한 최남단)의 한국인 집단 내에서 유의미한 유전적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단일함을 강조했다. 동시에 ALDH1 결핍, Pi-ZZ 표현형, 숙사메토늄(suxamethonium) 민감성에 대한 유전적 빈도 연구 결과 다른 인종 집단에 비해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집단 간의 유전적 빈도가 전반적으로 유사하다고 결론 내리며 이 집단들 사이의 유전적 연관성을 강조했다. 이 결론은 전후 한국 집단 유전학이 골머리를 앓던 연구 대상의 대표성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백용균 연구팀이 연구 대상으로 삼은 서울, 충남, 제주의 대학생들은 각 지역을 대표하는 생식적으로 격리된 고립 집단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이질적인 집단이었다[27]. 더군다나 이 연구의 자료와 결과는 그의 발표문 서론에 제기된 신분제라는 사회적 제도에 따른 생식적 격리(reproductively isolation)도, 한국 내 집단과 한국인 집단과 다른 집단 간의 언어와 관습의 차이도 전혀 반영하지 않았지만, 마치 이와 연관한 생물학적 연구 결과를 보고한 것처럼 서술되었다.
이 공동 연구는 한국과 서독의 약물 유전학 연구자 양쪽에게 호혜적인 프로젝트였다. 먼저 백용균 개인에게 이 연구는 알코올 중독의 유전적 소인이라는 임상적 유용성을 갖고 있어 의대 소속 교수이면서도 초파리 유전학 전공자라는 비교적 취약한 그의 의학적 기반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 나아가 백용균은 한국인 “집단”의 “약물” 유전학적 특성을 탐구함으로써 집단 유전학이라는 자신의 학문 정체성과 의학 유전학이라는 분과 소속 사이의 긴장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서독 약물 유전학자와의 교류는 당시 유전공학 기초연구 분야에서 서독과의 과학 협력 장려 정책으로 제공되는 예산을 백용균 연구실이 수여받는데 용이한 배경이 되었다. 1986년 9월 한독과학기술협력협정이 타결되고 한국과 서독 사이의 과학 교류가 강화되는 분위기 가운데, 1988년 한국과학재단과 서독 막스플랑크연구소 사이의 기초 과학연구 협력의 일환으로 한독분자유전학 심포지엄이 전개되는 등 생명과학 제 분야의 과학 교류에 대한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 확대되었다(과학기술처, 1990: 116). 실제로 백용균은 1985년부터 한국과학재단과 독일의 독일연구재단(Deutsche Forschungsgemeinschaft, DFG)으로부터 한독 공동연구의 이름으로 연구 경비를 지원 받았다(백용균박사기념사업회, 1991: 71).
반대 극에 위치해 있던 괴데를 비롯한 서독 약물 유전학자들에게도 이는 단순한 시혜적 프로젝트가 아니었는데, 괴데에게 한국인 집단의 알코올 민감성에 관한 약물 유전학적 연구는 몽골 인종 집단의 알코올 민감성이 유전적으로 다른 인종 집단보다 높다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확실하게 뒷받침해줄 마지막 퍼즐이었기 때문이다. 괴데의 연구팀은 1978-1981년 사이에 도쿄대학 이학부 인류학과의 하라다 쇼지(原田勝二)와 함께 일본인 집단의 ADH 및 ALDH 동질 효소 결핍 관련 유전 빈도 데이터를 착실히 확보해 오고 있었다 (Goedde, Agarwal, and Harada, 1983) [28]. 이에 더해, 이런 일본인과 독일인 유전 자료 간의 차이가 알코올 민감성이라는 표현형적 차이와 강한 상관관계를 보이는 것을 확인하면서, 알코올 민감성에 대한 몽골 인종 기원 집단과 코카서스 인종 기원 집단 사이의 “인종적 차이”에 관한 가설을 제안했다(Goedde, Harada, and Argarwal, 1979). 이들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집단에 대한 연구 또한 수행했으며, 오직 한국인 집단만이 시료 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검토되지 못하고 있었다(Goedde and Agarwal, 1985). 괴데는 백용균과의 협력 연구를 통해 한국인 집단에 대한 데이터를 확보함으로써 ALDH1 동질 효소 결핍 유전 빈도의 지리적 분포도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1989년 괴데는 알코올 중독에 관한 생의학적, 유전학적 측면에 관한 연구서 발간을 주도했는데, 알코올 분해 대사과정에 대한 유전적 변이 및 생리학적 함의를 검토하는 장에서 괴데는 ALDH1 동질 효소의 결핍이 알코올 섭취 후 홍조 현상을 유발하며, 이를 유발하는 동질 효소 결핍의 유전적 빈도가 몽골인종에게서 가장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세계 지도를 제시했다(그림 1). 여기서 그는 백용균과 공동 연구를 통해 얻은 연구 결과인 한국인 집단의 유전적 빈도를 삽입함으로써 동아시아 지역 전체를 음영처리할 수 있었다(Goedde and Agarwal, 1989).
괴데의 약물 유전학적 기획은 홍조 현상이나 심박수 증가와 같은 알코올 민감성에 대한 “인종적 차이”를 사회문화적, 환경적 요인 대신 유전적 기작으로 설명하려는 데서 인류학적 관심들과 쉽게 연결되었다. 이들은 “인종”을 서로 다른 유전적 기원을 가진 집단으로 정의했으며, ALDH1 동질 효소 결핍 빈도는 아시아 집단에서 꽤 뚜렷하게 지리적 거리에 상응하는 연속변이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에 따라 이들의 데이터는 아시아 내 인류 집단의 이주를 탐구할 유전적 자료로 활용될 수 있었다. 실제로 괴데와 동료들은 약물유전학과 집단 유전학 연구를 오가며 연구를 수행했으며, 괴데와 함께 일본인의 ALDH1 동질 효소 결핍 빈도를 확인하고 “알코올 민감성의 인종 차”에 대한 가설을 발전시킨 하라다 쇼지는 일본의 분자 인류학자들과 함께 이를 일본인 기원에 대한 유전학적 논의를 발전시키는 데 사용했다(原田勝二, 1999; Goedde et al., 1984).
이런 맥락에서 백용균 역시 자신의 유전의학 지향 연구를 인류학적 가치를 지닌 학술 활동으로 인지했다. 1986년 연구에서 그는 자신의 연구가 “생태 유전학”(약물 유전학)과 같이 의학적 유용성에 대한 탐구일 뿐만 아니라 “집단유전학”의 관점에 기초한 인류학적 연구라고 소개했다. 이에 더해 그의 약물유전학 연구의 일환으로 출판된 논문들은 일본인이나 한국인의 기원에 관한 유전학적 연구에 채용되기도 했다(Saha and Tay, 1992; Omoto and Saitou, 1997). 백용균의 이런 태도는 초파리 집단 유전학자라는 연구 경력과 분명히 연관되지만, 동시에 약물 유전학 연구 네트워크 전체에서 발견되는 경향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백용균과 유사한 연구 프로그램을 수행하던 한국의 유전학자들은 백용균과 달리 “한국인이 단일민족”이라는 언술 이외에는 한국인 집단의 인류학적 특성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현재환, 2018). 백용균이 “한국인은 몽골인종”의 일부라는 진술과 함께 한국인에 대한 민속학적, 인류학적 설명들을 소개하는 서술 방식은 괴데와 서독의 약물 유전학자들이 연구 대상이 되는 집단을 인류학적 설명들을 활용해 소개한 후 관련 유전학적 자료를 설명하는 방식을 좇은 것이었다(Goedde et al., 1984). 이와 더불어 괴데와의 접촉을 통해 약물 유전학 연구를 수행하기 전까지 백용균의 인류 유전 연구가 다른 의학 유전학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임상 검사에 치우쳐져 있었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바꿔 말해, 독일 약물 유전학자들과의 국제협력이 그의 유전의학 지향적 연구 결과를 인류학적 연구를 위한 자료로 재해석하게 만드는데 기여했다.
이렇게 초국적 교류 가운데 의학 유전학 연구를 통해 한국인 기원을 논하게 되는 경우는 집단 유전학과 의학 유전학 사이의 회색지대에 걸쳐있던 백용균 개인의 사례로 한정되지 않는다. 다음 절에서는 한국인 집단의 HLA 다형성 연구들을 검토하면서 초국적 교류가 집단 유전학 연구와 무관한 의학자들이 한국인의 기원과 이주를 유전학적으로 말하도록 이끈 중요한 배경이었음을 살필 것이다.

4. HLA 다형성 연구의 ‘정치’와 한민족 이동설

인간백혈구항원(HLA)은 인간 주조직 적합성 복합체인 단백질 항원을 암호화하는 유전자 복합체이다. 이 단백질 항원들은 인체 내 백혈구와 기타 유핵세포 표면에 존재하고, 이 HLA 항원의 조합은 유전되며, 동종항원으로서 “자기”(self) 조직과 “비자기”(non-self) 조직을 구별하여 후자에 대해 면역 반응을 일으킨다. 그렇기에 장기 이식 및 골수 이식 과정에서 이식된 조직에 대해서 수혜자의 면역 시스템에 의해 거부 반응이 일어나거나 공격받지 않도록 공여자와 수혜자의 HLA 검사를 수행하여 가장 일치하는 공여자를 물색하는 것이 일반적인 의료 지침이다. 그러나 공여자 물색이 쉽지는 않은데, HLA는 적응적 면역계를 세밀하게 조절하도록 수많은 대립 유전자를 가질 수 있고, 그 결과 유전체 내에서 가장 높은 유전적 다형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장 유전적 다형성이 큰 것으로 알려진 HLA B좌의 대립 유전자 빈도의 수는 2014년 현재 3,589개에 달한다.
이런 다형성은 HLA가 처음 발견되던 시기부터 막대한 양의 정보를 만들어 냈으며, 연구 초기부터 국제적인 협업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촉진했다. 1958년 장 도세(Jean Dausset)는 여러 차례 수혈한 환자들의 혈액이 다른 환자들의 백혈구에 면역 반응을 보이자 이를 야기하는 가설적인 인자로 백혈구항원을 상정하고, 이에 MAC(현 HLA-A2)란 명칭을 부여했다. 수년간의 연구 이후 백혈구항원의 높은 다형성과 복잡한 유전적 메커니즘이 한 두 개의 실험실에서 탐구할 수 없는 양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 때문에 HLA 연구자들은 1964년부터 서로의 시약과 기술들, 그리고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교류하기 위한 국제 조직적합성 워크샵(International Histocompatibility Workshop, IHW)을 개최했다. 첫 워크샵에서 HLA 연구자들은 서로 동일한 대상을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명법의 차이로 이를 깨닫지 못해왔으며, 실험실마다 각기 다른 실험 기법을 사용해왔음을 확인했다. 이후 1965부터 1972년 사이에 다섯 차례의 IHW가 개최되었고, 2008년 제15차 워크샵이 성황리에 막을 내릴 정도로 꾸준히 이루어졌다. 개최를 거듭하면서 IHW의 참여 과학자의 수 또한 늘어났으며, 1968년에는 WHO의 지원 하에 WHO HLA 체계 명명 위원회가 설립되어 명명법이 확립되었다. 명명법과 연구방법이 확립된 1970년부터는 세계 각국의 실험실들이 같은 항혈청을 선택하여 이에 대한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Thorsby, 2009).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HLA 연구는 크게 네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HLA 자체에 대한 면역생물학적 연구, 질병과의 상관관계 연구, 장기이식 관련 연구, 인류 집단의 HLA 다형성 연구가 이에 해당되었다(Terasaki, 1990). 특히 인류 집단의 HLA 다형성 연구는 1972년 5차 IHW의 HLA의 인류학적 이용이란 주제 하에 시작된 것으로, 이 워크샵에서는 49개 인류 집단의 HLA에 대한 혈청학적 분석과 이를 활용한 카발리-스포르자(Luigi Luca Cavalli-Sforza) 연구팀의 계통도 분석, 그리고 장 도세의 인류 집단 사이의 유전적 차이와 지리적 거리의 관계에 대한 비교 분석 연구 등이 보고되었다(Dausset, Bodmer, and Bodmer, 1975). 인류학적 유전학자 카발리-스포르자는 이 워크샵에서 인류 집단 간 HLA 빈도 차로 계산된 유전적 거리(genetic distance)를 통해 한 종족 집단의 기원과 이주를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Cavalli-Sforza, 1973). 이런 인류학적 유전학 연구자들의 참여 이후로 HLA는 인류 기원 연구의 중요한 유전 표지자로 자리 잡았다.
국제 연구 동향을 좇아 한국인 HLA 분포를 탐구하는 연구들은 의학 유전학이 국내에 자리를 잡던 197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 초기 연구들은 인류학적 관심보다는 연구 테크닉을 한국 사례에 적용하는 것에 중심을 두었다. 1972년 서울의대 내과학교실 이원노가 처음으로 HLA의 국제 표준 혈청과 용례, 방법론을 사용한 연구를 시도했다. 그는 서울의대 부속병원 의사 및 직원과 혈액은행에 등록된 공혈자를 대상으로 WHO표준형 항혈청 HL-A에 대한 백혈구응집검사를 실시했다. 이 연구는 HLA 검사를 장기이식에 활용할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이원노, 1972) [29]. 2년 후 김진복을 위시한 서울의대 외과학교실의 연구자들은 간 이식 환자들을 대상으로 UCLA의 HLA 연구자 폴 테라사키(Paul Terasaki)가 고안하고 IHW에서 주요 연구 테크닉으로 채택된 미세림프구세포독성검사를 시행하여 HL-A 항원의 분포를 검토했다(박우택, 김진복, 1974). 같은 해 김진복의 지도를 받던 홍준호는 신장 이식과 관련한 HLA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앞의 연구처럼 혈액공혈자, 외래건강문진자, 병원 직원들을 대상으로 미세림프구세포독성검사를 실시했다. 이들의 연구 역시 표준혈청과 미세림프구세포독성검사를 활용해 한국 내에서 정확하고 표준화된 HLA 연구 방법을 확립시키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었다(Hong and Kim, 1974: 39). 한 해 전 서울의대 내과학교실의 최규완과 소아과학교실 동료들의 HLA 항원 연구 또한 유사한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이들은 정상인 및 내과 환자를 대상으로 미세림프구세포독성검사를 실시하여 한국인의 HLA 다형성 분포를 검토했다. 이 연구는 본래 질환과 HLA 빈도의 상관관계를 살피는 연구였으나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이순용, 고광욱, 최규완, 1973). 이들은 후속 논문에서 분석 예수를 추가하는 대신 자신들의 종래 분석 결과를 한국인에 대한 HLA 분포에 대한 종래 연구들의 데이터와 비교했다. 이들 또한 연구 의의를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이 방면의 연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를 선구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에서 찾았다(민헌기, 최규완, 이순용, 1977: 255).
실제로 한국인 의학자들이 당시 IHW에 의해 주도되던 주요 연구 분야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였다. 이는 부분적으로 1980년 9월에 대한면 역학회와 대한이식학회의 공동 초청으로 UCLA의 테라사키가 서울대 의대에서 “HLA Typing과 장기이식”을 주제로 한 강연을 진행하고 한국 의학자들에게 본인의 연구실 주도로 개최된 제8차 IHW의 학문적 성과를 소개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박기일, 1994). 이후 임상의들은 특히 HLA와 질병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1979-1987년 사이에 국내 학술지에 게재된 HLA 연구들을 살펴보면 많은 논문들이 HLA와 각종 질병과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였고, 신장 이식 등 1960년대 말부터 실시되던 이식 수술들의 증례가 어느 정도 쌓이고 골수 이식이 본격화되는 1985년 무렵부터는 HLA와 장기이식에 대한 연구 또한 늘어났다.
같은 시기 동안 인류학적 관심 하에 한국인의 HLA 다형성을 조사하는 연구들도 등장했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연세의대 미생물학과교실의 김세종, 서울의대 임상진단병리학과교실의 김상인과 박명희, 한양의대 내과학교실의 김목현의 연구이다. 중요한 점은 이 연구 그룹들이 모두 HLA와 질병 연관을 주요 연구 분야로 삼고 이에 몰두하던 집단들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세종 연구실은 한센병을, 박명희는 강직성 척추염을, 김목현은 만성 B형 간염을 HLA 빈도의 연관성과 관련하여 연구했다(이상헌 외, 1984; 최성재, 박명희, 1987; 김목현, 이민호, 1985; 김세종, 1986). 이들은 오직 한두 차례 정도만 인류학적 탐구를 위한 한국인의 HLA 빈도 연구를 수행했으며, 이후에는 다시 HLA와 질병 연관성에 대한 임상적 연구 주제로 돌아갔다.
임상의들은 학문 정치적인 이유로 국제 공동 연구 네트워크에 편입하려고 노력하면서 점차 인류학적 연구로 나아갔다. 1980년 2월 테라사키의 주도로 LA에서 제8차 IHW가 개최되는 가운데 WHO 백혈구항원 명명위원회 회의가 함께 열렸다. 위원회는 이 회의를 통해 명명법을 대대적으로 개정했으며, IHW는 동아시아의 여러 집단의 HLA 다형성에 대한 공동 연구를 실시했다(Terasaki, 1980). 이때 일본인 집단에 대해서는 모든 동아시아 집단 중 가장 상세한 조사가 이루어진 반면 한국인 집단에 대한 연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한국에서 HLA에 대한 연구를 막 진행하던 의학자들의 국제 공동연구의 참여가 한편으로는 과학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제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사실 단백질 다형성 연구는 특정 민족 혹은 국가의 국민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탐구한다는 데서 의학 연구자들의 민족주의가 발현되는 중요한 분야였다. 예를 들어 헤모글로빈 다형성과 관련해 멕시코와 일본, 한국 등 각국의 연구자들은 모국 집단에서 발견된 돌연변이형에 자국의 이름(Hb Mexico)이나 발견 지역(Hb G Taegu, Hb Hofu, Hb Hiroshima), 혹은 자국의 민족적 상징이 되는 도시(Hb Chiapas)와 같은 명칭을 부여했다(Blackwell, Huang, and Ro, 1967; Miyaji et al., 1968; Rulz-Reyers, 1983). 이 같은 명칭들은 돌연변이형의 실제 기원과 관련 없이 해당 다형성에 ‘정치적 국적’을 부여하는 동시에, 해당 국가의 과학자 공동체가 이런 돌연변이를 발견할 과학적 역량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표징으로 기능했다. 네덜란드 연구자에 의해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바가족에서 발견한 헤모글로빈 돌연변이형에 국가나 도시명이 아닌 해당 종족 집단의 멸칭인 바빙가 피그미족(Hb Barbinga)이 사용된 것은 과학 민족주의와 관련한 다형성 연구의 정치성을 잘 보여준다(de Jong and Bernini, 1968). 유사한 맥락에서 일본인 집단의 HLA 다형성만이 동아시아 집단으로 연구되는 상황은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한국인 집단”을 생물학적, 정치적으로 일본인 집단과 구별되는 대상으로서 국제 학계에 보고하는 일이 한국인 집단의 생물학적 실재성을 부여하는 일뿐만 아니라 한국의 HLA 연구 공동체의 학문적 역량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로 부각되게 만들었다.
이와 함께 인류학적 HLA 연구에 연루되려고 노력한 한국의 의학자들이 모두 질병 관련 HLA 연구자였다는 점도 특기할만하다. 실제로 당시 관련된 기술적 발전 및 인프라 확충 등에 의해 임상적, 학술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기 시작한 장기 이식 연구자들과 달리, 질병 관련 연구자들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30]. 이들이 자신들의 질병 관련 HLA 연구를 국제 연구 네트워크와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고리는 “기초 자료 조사”에 해당되는 인류학적 연구에 자신들의 연구 자료와 역량을 투여하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들 가운데 서울의대 박명희와 김상인은 제8차 IHW에서 새로이 정해진 명명법에 따라 수행된 한국인 HLA 빈도 연구가 부재함을 강조하며 한국인의 HLA의 항원 빈도, 유전자 빈도, 일배체형(haplotype) 빈도를 분석했다. 이들 연구의 강조점은 제8차 IHW에 보고된 일본인 집단의 HLA 빈도와의 유사성과 차이를 규명하는데 놓여 있었다(박명희, 김상인, 1984). 연세의대 미생물학교실의 김세종 역시 1981년 프레드 허치슨 암연구소 조직적합성 실험실의 초빙교수로 근무하던 당시 유사한 논리로 한국인 집단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실시했다. 1986년에 암연구소의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출판한 한국인 집단의 HLA 체계에 관한 논문은 한국인 집단이 “공통의 언어와 유사한 관습을 공유하며 상대적으로 균질한 집단(homogeneous population)”을 이루는 흥미로운 특징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이나 일본인의 경우와 달리 1980년 WHO 명명법을 반영한 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S. J. Kim et al., 1986).
한양의대 내과학교실의 김목현도 동일했다. 그의 교실 역시 1981년 이래 만성 B형 간염 분포와 HLA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실시했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는 UCLA 테라사키 실험실의 동아시아인 맞춤 HLA 트레이를 사용했는데, 해당 트레이가 1980년 IHW에서 확보된 일본인 HLA 자료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한국인의 다형성을 반영하지 않아 “우리 민족의 HLA 검사에는 부적당한” 점이 이런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았다고 추론했다(김목현, 이민호, 1985). 이런 이유로 김목현은 한국인 집단의 HLA 다형성 분석을 목표로 국제 HLA 공동 연구, 특히 지역 공동 연구 협의체에 접맥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 HLA 연구자 풀이 급증하는 1970년대 중반 무렵부터 구미 연구자 중심의 IHW와 독립적인 HLA 공동 연구 프로그램들이 등장했다. 아시아-범오세아니아 조직적합성 컨퍼런스(Asian Pan-Oceanian Histocompatibility Workshop, AOHW)는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지역적 공동 연구 활동이자 연구 협의체였다. 1977년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에서 첫 AOHW가 개최되었고, 26개 실험실이 다섯 인종 집단(코카서스인, 태국인, 중국인, 오키나와인, 일본인)에 대한 HLA 빈도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1981년 호주 멜버른에서 개최된 2차 AOHW에서도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의 “종족적으로 다양한 집단들”의 정보를 활용하여 HLA의 유전과 질병 관계에 대한 문제들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12개국의 48개 실험실이 참여했다(Amods and Van Rood, 1993).
김목현은 1986년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열린 제3차 AOHW의 28개의 종족 집단별 대표 연구자(chairman) 가운데 한국인 집단 대표 연구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워크샵 주최측으로부터 표준 패널을 분양받아 한양의대 내과학교실과 가톨릭의대 미생물학교실 연구자들이 공동 분석한 남한 거주 한국인의 HLA 분포 자료와 동일 패널을 활용한 중화인민공화국 연구팀의 중국 선양 거주 한국인(조선족) 조사 결과를 종합해 인류학적 차원에서 논의하고, 인접 지역 집단들과의 유전학적 거리 등을 분석하는 역할을 맡았다(Aizawa et al., 1986; M. H. Kim et al., 1986). 여기서 한양의대와 가톨릭의대 연구팀 모두 집단 유전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무한 의학자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이 유전적 거리와 계통도 분석을 오직 AOHW를 통해서만 학습할 수 있었음을 유념해야 한다. 이들은 3차 AOHW를 이끈 홋카이도의대 병리학교실과 도쿄 교린의대 외과학교실 연구자들의 통계 연구 방법 및 분석 결과를 활용해 연구를 수행했다. 그 결과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적 거리가 가장 가깝고, 그 다음이 중국인(북부)이며, 일부 HLA 빈도에서는 일본인과 한국인, 중국인 순의 연속변이를 보여주는 항원들이 존재하고, 일부 항원들의 경우 한국인에게서 가장 분포가 높게 나왔다고 보고했다(Kim et al., 1986: 214).
김목현 연구팀은 이런 유전학적 결론들을 한국인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이 보고에서 김목현 연구팀은 “아시아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 종족 이주(ethnic migration)가 일어났다면 한반도는 반드시 거쳐가야만 하는 주요 통로(the main gateway)”였다는 “지리적” 배경과 함께 아래의 “인류학적” 배경을 어떠한 인용도 없이 주어진 역사적 사실로 설명했다.
  • 한민족(Korean ethnic group)은 다른 동양인(Orientals)과 같이 고아시아족(Palaeoasiatics) 군에서 주로 기원했으나, 중국인과는 다른 퉁구스-몽골계 인종에 속한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기본 언어학적 문법은 동일한 퉁구스-알타이어군에 속하며 이 두 집단의 고대예술도 매우 유사한 것을 미루어볼 때 상당수의 한국인은 틀림없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중국과의 문화 교류 과정에서 동남아시아(South East Asia)가 아니라 해류를 따라 남쪽에서 온 집단과 혼합되었을 가능성도 언급되어야만 한다. (Kim et al., 1986: 212-213)

이처럼 퉁구스족과 알타이어족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 집단으로 보면서 한민족의 기원에 남방계통 종족 집단의 영향이 일부 가미되었을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은 고고학자 김원룡의 견해이다(김원룡, 1964). 다만 김원룡 역시 동료 김정학과 마찬가지로 한민족 기원 형성에서 남방민족의 영향을 매우 제한적으로 봤는데, 이런 종합적인 견해는 김목현 연구팀의 논의에서 무시되었다. 연구팀은 중국에서 한국, 일본으로의 “인종 이주(racial migration)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심화된 연구가 필요하다”라며 글을 마무리지었다(Kim et al., 1986: 214). 그러나 이런 온건한 결론이 무색하게 이듬해에 연구팀은 어떠한 추가 조사나 분석도 없이 3차 AOHW의 자료를 그대로 활용하여 계산된 한국인과 주변 집단 간의 유전적 거리와 한국 내 지역별 유전적 거리를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된 “인종 이주”에 대한 과학적 발견으로 보고했다(이재호 외, 1987a; 1987b).
김목현 연구팀이 제3차 AOHW에서 발표한 연구는 당시 언론에 “아시아 지역의 민족이동 경로와 인종간의 유전적 거리를 의학적으로 측정, 중국→한국→일본의 민족 이동설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자료”이자 “한·일은 유전형질로도 사촌”임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로 보도되었다[31]. 뿐만 아니라, 1991년 제11차 IHW에서 한국인 집단의 HLA 분석을 수행한 서울의대의 박명희 역시 김목현 그룹이 제공한 한국인 집단에 대한 설명을 주어진 “역사적 사실”로 그대로 활용하여 한국인, 일본인, 몽골인, 북부 중국인 사이의 HLA 빈도 비교와 동부 아시아인의 이동 경로를 추론하는 연구를 수행했다(박명희, 1994).
한편 한국인 HLA 연구에서 해방 이후 혈액형 유전학과는 다른 경향이 발견된다. 그것은 한국인과 일본인 집단 사이의 유전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불과 10여 년 전 연세의대의 혈액학자 이삼열은 한국인과 일본인 간의 혈액형 빈도의 미세한 차이를 지적하며 한국인 집단의 독특성을 강조했다(Hyun, 2019b). 서울의대 해부학교실의 체질 인류학자 나세진 역시 이런 미세한 혈액형 빈도를 한국인의 단일민족됨의 과학적 증거로 제시했다(현재환, 2015). 이와 달리 한양의대 김목현 연구팀과 서울의대 박명희 연구팀의 HLA 연구는 일본인과의 긴밀한 연관성을 강조하는 방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이삼열이나 나세진의 연구가 혈액형을 통한 각 집단의 “분류”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HLA 연구자들의 연구는 동아시아 집단의 “이주”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김목현 연구팀의 “한민족은 중국인과 구별되는 퉁구스-민족”이지만 “해류를 따라 남쪽에서 온 집단”이 한국인의 기원에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는 서사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 정설로 자리하던 단일민족론과 단일 기원 논의에 위협적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당대의 한국인 집단에 대한 민족주의적 진술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연구를 전개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유전형질로 볼 때 사촌”인 것은 만주-시베리아 지역에서 거주하던 한민족이 한반도로 이주하여 현대 한국인을 이루고, 이 현대 한국인이 “문명”의 이기들을 들고 일본 열도로 건너가 현대 일본인들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이지, 거꾸로 일본인 집단의 유전형질이 한국인의 유전자 풀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실 이는 민족주의적 국사 서술에서 늘 통용되던 서사였다. 이와 함께 연세의대의 김세종의 HLA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한국인 집단은 계속해서 “공통의 언어와 유사한 관습을 공유하며 상대적으로 균질한 집단”으로 가정되었다(Kim et al., 1986: 259).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의학 연구자들이 한국인 집단의 기원이나 종족적 특성을 설명할 때 역사학 문헌들을 인용하는 방식이다. 백용균과 김목현 등은 각기 『한국문화사대계』에 실린 두 고고학자 김정학과 김원룡의 연구에 기대어 한국인의 종족적 특성을 설명했다. 김정학은 한국민족이 퉁구스족, 고아세아족, 남방계통 종족 집단의 요소가 섞여있고 중국인과 일본인 등과 약간의 혼혈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극히 소수여서 한민족의 체질이나 언어에 변화를 가져올 정도는 못되고, 한민족은 시베리아 유래 북방계통 종족 집단 가운데 알타이족에 가장 가깝고 북방 집단의 요소가 체질, 언어, 문화에 있어서 압도적이라는 북방기원론을 결론으로 제시한 반면, 김원룡은 퉁구스족과 알타이어족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 집단으로 보면서 한민족의 기원에 남방계통 종족 집단의 영향이 일부 가미되었을 가능성을 강조했다(김정학, 1964; 김원룡, 1964). 해당 문헌들을 인용조차 하지 않은데서 드러나듯이, 이 둘은 왜 다른 두 견해 가운데 하나를 택했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 없이 각각의 설명을 잘 확립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다. 또 고고학자들의 전체 견해가 아니라 자신들의 논의에 필요한 사항만을 취사선택했다. 두 인류 유전 연구자가 특정한 역사학적 진술들을 채용했던 것은 과학적 연구를 통해 이런 진술들에 문제제기 하는게 아니라 반대로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들은 해석적 도구로 역사적 진술을 활용하면서도 해당 역사적 진술이 잘 확립된 견해인지, 혹은 논쟁 중인 사안인지 등에 대해 전연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기원에 대한 역사학 및 고고학계의 논의에 대한 파악이나 고려 없이 특정 역사적 견해를 주어진 사실처럼 다루는 의학 유전학자들의 태도는 과학적 연구를 통해 종래 한국인 기원론을 비판하기보다는, 당대의 대중적인 이해와 부합하는 ‘과학적’ 결론을 도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5. 맺음말

본 논문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 임상 의학 연구자들이 인류학적 용도로 그들의 유전학적 자료를 활용하고, 그 부산물로 한국인 기원론에 대한 언설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검토했다. 이들은 병상과 실험실을 오가며 한국인 집단의 혈청 및 효소 단백질과 HLA 정보를 수집했다. 이런 수집 활동은 유전학의 의학적 활용이나 질병과의 상관관계 연구 등 임상적 필요성과 관련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자연과학대학 소속 유전학자들과 달리 의과대학 소속의 의사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제도의 특성상 한국인 집단의 유전적 특성을 독립적인 연구 주제로 삼을 수 없었다. 만약 이들이 이런 기초과학적인 주제를 연구한다면 그것은 임상적 함의를 반드시 내포해야만 했다. 한국 의학 유전학이 의과대학 내에서 산전진단을 위한 염색체 검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고, 철저히 유전자 검사와 관련된 연구들로 한정된 것은 이와 같은 제도적 제약을 잘 보여준다. 이런 까닭에 의학자들이 한국인 기원과 같이 제도와 맞지 않는 주제로 ‘일탈’하는 데에는 다른 외부적 요인이 필요했다.
이 글은 그런 외부적 요인으로 초국적 과학 교류를 강조한다. 백용균은 자신의 집단 유전학자로서의 정체성과 의학 유전학이라는 제도적 기반 사이의 긴장 가운데 이를 해소할 방안을 독일 유전학자들과의 한국인 집단의 약물유전학 공동 연구를 통해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독일 연구자들의 연구 문법을 좇아 한국인의 기원에 대한 인류학적 설명을 도입했다. HLA 연구자들은 한편으로는 일본인 집단만이 동아시아인 HLA 다형성 연구의 대상으로 추진되는 상황과 다른 한편으로는 질병 관계에 대한 연구 성과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 IHW와 AOHW와 같은 국제 공동 연구 플랫폼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한국인 집단에 대한 인류학적 HLA 연구를 한시적으로 추진했다. 김목현의 사례가 보여주듯 AOHW가 제시하는 가이드라인과 연구 방법 및 자료들 없이는 집단 유전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무한 이들 의학자들이 한국인의 기원과 이주를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백용균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특히 HLA 사례의 경우에서는 의학자들의 한국인 기원에 대한 관심은 집단 유전학자들과 달리 구미 연구자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장기적인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초국적 과학 교류는 의학자들이 한국인 기원 연구로 나아가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그 영향력은 한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의학자들은 오직 자신들의 학문 정치적 상황들을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가 될 수 있을 때에만 국제 연구 네트워크에 편입되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의학자들에게 한국인 기원 연구는 한시적 국제 활동의 부산물이었지 중심 연구 주제가 아니었다.
이런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의학자들은 동시대의 체질 인류학자 및 집단 유전학자들과 동일하게 과학 연구에 혈통적 한민족 개념을 채용하여 한민족에 생물학적 실체를 부여하는데 기여했다. 카발리-스포르자는 HLA 다형성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를 제안하면서 후속 연구자들이 단백질 다형성 자료를 활용한 계통도 분석을 통해 발견되는 유전적 유사성과 친족 관계를 혼동하지 않기를 충고했다. 그에 따르면, 특정 유전자의 평균 빈도의 차이에 따라 계산되는 유전적 거리는 후손(descent) 혹은 근친교배로 의해 나타나는 “친족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 부동과 같은 우연이나 다른 자연적 요인에 의해 일어난 차이를 측정하는 것이다(Cavalli-Sforza, 1973). 그러나 한양대 김목현 연구팀은 정확히 “친족 관계”에 대한 정의 하에 유전적 거리 연구를 수행했다. 이들은 “HLA 항원 및 이들 조합의 출현 빈도는 가족 간의 차가 있을 것이며 따라서 각 가족 간의 친족 관계가 멀수록 이들의 차는 커지게 될 것”이고, “이러한 출현빈도를 이용하여 각 민족 간의 유전적 거리를 측정할 수 있어” 이를 통해 “각 민족 간의 유대 관계뿐만 아니라 민족 이동의 자취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이재호 외, 1987a: 739). 이런 이해 하에서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집단과 남한 거주 한국인 집단, 그리고 중국인 집단과의 HLA 유전자의 빈도 차이에 따른 유전적 거리는 이들 사이의 혈통적 거리를 측정하는 것과 동일시되었다(Kim et al., 1986). 이처럼 이들 연구에 혈통적 민족 개념의 이해가 깔려 있었기 때문에 김목현 연구팀은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에 대한 유전적 거리에 대한 연구를 이 세 집단이 “유전적으로 사촌”임을 보여주는 연구라고 언론에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런 한민족됨의 유전학화는 이들의 연구가 대중적 언설로 번역되면서 한국의 종족 민족주의를 확실히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었다. 제3차 AOHW에 김목현 연구팀과 함께 참가하여 인슐린 의존형 당뇨병과 HLA 다형성과의 상관관계를 보고했던 서울의대 내과학교실의 이홍규는 해당 워크샵에서 HLA 다형성을 활용한 종족 집단의 이주 연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32]. 이에 따라 당시 HLA 다형성 연구와 백용균의 약물 유전학 연구 결과, 한국의 집단 유전학자들의 연구 성과, 그리고 국내외 인류의 기원 및 일본인의 기원에 대한 연구들을 참고하여 한국인의 기원을 “분자 유전학적”으로 추론한 종설 논문을 『한민족』 창간호에 게재했다(이홍규, 박경숙, 1989). 여기서 이홍규는 HLA 다형성 연구와 같은 분자 유전학적 연구가 한민족의 기원이 남동 시베리아 지역의 바이칼호임을 시사한다고 결론지었다. 이 논문은 서론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당시 “한국인의 뿌리를 밝히는” 첫 과학적 연구로 언론에 보도되었다[33]. 대중적 차원에서 한민족 단일민족론의 중요한 뼈대인 북방기원설이 유전학적 차원에서 증명된 것처럼 다루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1980년대 의사들의 “한민족의 뿌리”에 대한 언설 또한 한국 사회의 종족 민족주의를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지하고 공모하는 역할을 떠맡을 것이었다.

Notes

1) 「한민족 뿌리는 북몽고 계통」, 『경향신문』, 1989년 3월 31일.

2) 1970년대 이후 분자유전학적 방법을 사용해 인류의 기원을 탐구하려는 시도에 관한 역사적 개설은 Sommer (2008).

3)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기원에 관한 생물학적 연구들에 대한 논문들로 현재환 (2015), 坂野徹 (2005), 정준영 (2012), 김옥주 (2008), Hyun (2019a) 참고.

4) 일본의 상황에 대해서는 일본 분자 인류학계를 이끌던 연구자 중 한 명인 오모토 게이치(尾本惠市)의 소개를 참고(尾本惠市, 1987). 예외적인 사례로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유전학교실의 백용균을 들 수 있는데, 그 역시 스스로를 인류 유전학자 내지 분자 인류학자로 정의하지는 않았다. 아래에서 살펴보게 되겠지만 그의 한국인에 관한 유전학 연구는 다양한 연구 프로그램 가운데 일부에 불과했다.

5) 해방 이후 남한에서 한국 고대사 연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개인적인 연구를 추진한 예외적인 의학자로는 최동을 들 수 있다. 그의 이력에 관해서는 이규식, 양정필, 여인석 (2004)을 볼 것.

6) 냉전이라는 지정학적 배경 가운데 초국적 의학 연구 네트워크가 한국의 보건 및 의학 연구에 끼친 영향을 검토한 논문들은 주로 가족계획을 사례로 삼았다. 이에 대해서는 정준호, 김옥주 (2017), DiMoia (2013), 조은주 (2018) 참고.

7) 총무처 의정국 의정과, 「모자보건법」 (BA0084664, 국가기록원, 1972).

8) 1960년대 이후 가족계획사업에 대한 연구로는 DiMoia(2013)조은주(2018) 참고. 한국 우생학에 대한 논의는 신영전 (2006), 신영전, 정일영 (2019), Kim (2016) 등을 참고.

9) 「아물지 않는 광도의 비극: 원자폭탄 투하 20년. 1965년 8월 15일. 8.15 미결의 장」, 『경향신문』, 1969년 8월 15일.

10) 「심각해지는 정신박약아 문제」, 『동아일보』, 1970년 8월 7일.

11) 「예산에 비친 사회복지 <2> 아동」, 『동아일보』, 1971년 1월 19일.

12) 「육여사 참석 정박아의 새 보금자리 자혜학교 개교식」, 『동아일보』, 1972년 10월 18일.

13) 「정신박약아 실태와 문제점」, 『경향신문』, 1970년 8월 20일.

14) 「문교부 내년부터 지진·정박아 중학진학 억제」, 『경향신문』, 1973년 8월 2일.

15) 「37%가 유전-우리나라 정신박약자 중」, 『경향신문』, 1969년 9월 29일.

16) 「산부인과에 세포유전학 도입」, 『이코노미톡뉴스』, 2000년 1월.

17) 서울대 동물학과 강영선 연구실의 세포유전학 연구의 발전에 관한 설명으로는 Hyun (2017)을 참고.

18) 다만 서울의대 인구의학연구소 역시 1984년에 산부인과교실의 문신용이 책임을 맡으면서부터는 산전진단검사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대한의학유전학회, 2011: 184).

19) 백상기 인터뷰, 대전, 2017년 2월 23일.

20) 백용균이 1970-80년대에 출판한 논문 목록에 대해서는 그의 정년기념논문집을 참고.

21) 백용균에 대한 의학 유전학계의 기대와 실망에 관한 회고로는 대한의학유전학회 (2011: 206) 참고.

22) 유전학자 이정주는 괴데와의 공동 연구를 생각하면서 그의 한국 방문을 추진했다고 회고했다. 이정주 인터뷰, 서울, 2017년 7월 4일.

23) 해당 프로젝트의 독일어 명은 Ökogenetische und Populationgenetische Untersuchungen in Korea이며, 이를 백용균은 공식적으로 “한국인의 유전자풀에 대한 생화학적 및 분자 생물학적 연구”라고 번역했다.

24) 2차(1988-1990)에서는 당시로서는 선구적으로 대립유전자-특정적 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 탐침을 활용해 DNA 수준에서 ALDH2와 ADH1의 유전형 분석을 실시했다 (백용균박사기념사업회, 1991: 78).

25) 「한국인 28% 술 안받는 체질-한양대 백용균 교수: 알콜 분해 효소 못만들어」, 『한겨레』, 1990년 3월 29일.

26) 영문 원문을 필자가 번역한 것이며, 한국 유전학자들이 “한민족”을 이야기할 때 “Korean race”로 번역하는 점에 기초해 원문의 “race”를 “인종” 대신 “민족”으로 번역하였다.

27) 1950년대부터 집단 유전학자들은 이 대표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립집단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고, 연구대상이 될 만한 고립집단을 찾아내기 위해 사회 인류학자들의 족내혼(endogamy)에 대한 연구들을 활용했다. 이에 관해서는 Lipphardt (2014)를 참고.

28) 하라다는 1981년부터 괴데의 연구팀과 ADH 및 ALDH1 결핍 유전 빈도의 인종 차이에 대한 공동연구를 실시했다고 말한다(原田勝二, 1999).

29) 여기서 HL-A는 혈청학적 방법으로 명명된 유전자 좌 HLA-A를 가리킨다. 1975년 WHO 명명법에 의해 “HL-A”는 “HLA”로 대체되었는데, 이 글에서는 1975년 이전에 논문을 출판하거나 WHO 명명법을 따르지 않은 행위자들이 “HL-A”로 명기할 경우 이를 그대로 두었다.

30) 종래에도 이루어지던 신장이식의 경우 1970년대 후반 의료보험의 수혜 대상자 확대와 1984년 면역억제제 사이클로스포린 (cyclosporine)의 도입 등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박기일 1994). 또 1981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김길영이 재생 불량성 빈혈 환자에게 동종 골수이식을, 1983년에는 가톨릭의대 혈관종양학과의 김동집 등이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환자에게 동종 골수이식을 성공하면서 골수이식 분야를 개척했다. 이들은 모두 HLA 검사를 통해 기증자와 수혜자의 조직형 일치 여부를 확인한 뒤 골수이식을 수행한 것으로, 장기 이식과 HLA 관련 연구의 중요성을 한층 배가시켰다. 「골수이식수술 성공한 김길영 박사」, 『동아일보』, 1981년 5월 23일; 「가톨릭의대 팀 백혈병환자 살렸다」, 『경향신문』, 1983년 4월 19일.

31) 「한대 의대 김목현교수 아·태 의학회서 발표: 한·일은 유전형질로도 ‘사촌’」, 『중앙일보』, 1986년 8월 26일.

32) 이홍규 인터뷰, 서울, 2017년 2월 8일.

33) 「한민족 뿌리는 북몽고 계통」, 『경향신문』, 1989년 3월 31일.

그림 1.
다른 인류 집단 사이의 ALDH1 동질 효소 결핍의 지리적 분포
The Geographical Distribution of ALDH1 Isozyme Deficiency in Different Populations
출처: Goedde and Agarwal, 1989: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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