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E-Submission | Sitemap | Editorial Office |  
top_img
Korean J Med Hist > Volume 25(3); 2016 > Article
재동 및 구리개 제중원의 입지와 배치 및 공간 구성에 관한 재고찰

Abstract

Jejungwon hospital, the first modern healthcare facility to be built in Korea, was built at Jaedong in 1885 and moved to Gurigae in 1887. Finally, it was moved to Dodong, outside the Namdaemun Gate, and its name was changed to Severance Hospital. The Jaedong Jejungwon hospital was located at a former house of HONG Youngsik, and it was expanded by renovating existing buildings and constructing new buildings in 2 years. The Gurigae Jejungwon hospital, which was located near Myeongdong Cathedral, was bigger than the Jaedong Jejungwon one and even provided residence to doctors.
Jejungwon hospital was a good example of the healthcare facilities that were available in early modern Korea; however, due to a lack of historical materials, it is not easy to analyze the buildings of Jejungwon hospital. Recently, several architectural drawings made by Japanese and photographs taken by foreigners in the early 20th century were discovered, which help us to understand the buildings of the Jejungwon hospitals in Jaedong and Gurigae. This study analyzes the locations and layouts of the buildings of Jejungwon hospital and, furthermore, traces the history of Jejungwon hospital following its relocation.
The Jaedong Jejungwon hospital was located at 35 Jaedong, as already known. By analyzing the architectural drawing of Kyeongseong Women’s High-School Dormitory, the exact size of the existing building of Jaedong Jejungwon was calculated as 12m × 3.9m. Since the relocation of Jejungwon hospital to Gurigae in 1887, the remnants of Jejungwon buildings were used as Gwangjewon (1900-1907); a vaccine-manufacturing plant (1907-1910); and, finally, the dormitory of Kyeongseong Women‘s High School(1910s-1950s).
The Gurigae Jejungwon hospital was assumed to be located at 193, 2nd street of Koganecho (黄金町) and 4, 1st street of Meijicho (明治町). In particular, the residence of Avison, which was built after 1894, was located at 4, 1st Street of Meijicho, the place with the highest elevation compared to surrounding areas. After 1905, Stevens, a foreign affairs adviser, lived there for one year, following which the Korean government office for agriculture and industry took over the place. The buildings that were used as the hospital at 193, 2nd street of Koganecho were transformed into the Daedong Japanese Club.
By analyzing the newly found research materials, it is possible to examine and revise the previous research on the Jaedong Jejungwon and Gurigae Jejungwon hospital buildings. Furthermore, it is noteworthy that the buildings of Jejungwon hospital in Jaedong and Gurigae have been reused as healthcare facilities over the years.

1. 서론

한국 최초의 근대의료시설인 제중원은 1885년 이후 재동과 구리개에서 각 2년여와 17년여의 시간동안 대지의 확장과 시설의 확충을 통해 근대 병원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이 시기 재동 제중원과 구리개 제중원은 조선 정부로부터 부지를 임차하여 기존의 한옥을 활용하거나 일부 건물을 신축하여 사용하였는데, 이는 근대 초기 한국의 전통적인 한옥을 활용한 병원건축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재동 제중원 및 구리개 제중원 건물은 각각 구리개와 도동으로의 이전(移轉) 이후에도 길게는 몇 십 년 이상, 짧게는 몇 년간 다른 용도로 전용되어 사용되었다. 재동 제중원 건물은 광제원, 두묘제조소,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창덕여자고등학교의 기숙사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구리개 제중원 건물은 외무고문의 관사 및 대동구락부 등으로 사용되다가 철거되었다.
재동 제중원과 구리개 제중원의 입지와 규모, 공간 활용 등에 대해서는 제한된 자료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연구 성과들이 계속하여 축적되어 왔다. 재동 제중원에 관하여서는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여인석 외, 1999), 재동 「재동 제중원의 규모와 확대과정」(박형우 외, 2000) 등의 연구논문과 『제중원』(박형우, 2010), 『제중원 세브란스 이야기』(신규환·박윤재, 2015) 『근대 의료의 풍경』(황상익, 2013) 등의 연구서에서 사진 자료들과 지도, 일기와 정부 문서 등의 분석을 통해 재동 제중원의 규모 및 배치 현황, 그리고 위치 등을 밝혀내었다. 특별히 「재동 제중원의 규모와 확대과정」(박형우 외, 2000)에서는 동시기 유사한 가옥인 박영효 가옥과의 비교분석을 바탕으로 추정도면까지 작성되었는데 이에 대해 황상익은 『근대의료의 풍경』(황상익, 2013)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어, 정확한 사실 확인이 필요한 상황이다. 구리개 제중원을 다룬 기존 연구 중 대표적인 것은 「구리개 제중원 건물과 대지의 반환 과정」(여인석 외, 1998) 및 「구리개 제중원의 규모와 활동」(왕현종 외, 2001) 연구로, 앞의 연구는 세브란스 병원의 건립 전후에 구리개 제중원의 건물과 부지가 조선 정부로 환수되는 내용과 그 이후 활용되는 과정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뒤의 연구는 지적도와 지적목록 등에 근거하여 구리개 제중원의 위치와 면적, 내부 공간 구성 및 활동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또한 「근대 병원건축의 공간변화와 성격-제중원에서 세브란스병원으로의 변화를 중심으로」(신규환, 2015)에서는 재동 제중원 및 구리개 제중원의 내부 공간 구성 및 가구 등을 당시 의료의 성격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 성과들은 재동 제중원과 구리개 제중원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들을 확인하고, 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하였으나, 한정적인 자료로 인해 재동 제중원과 구리개 제중원의 물리적 실체에 다가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최근 국가기록원 소장의 일제시기 건축도면들이 공개[1]되면서 재동 제중원 건축물의 일부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사용될 당시의 현황에 대해 검토가능하게 되었고[2], 또한 성 베네딕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소장 서울사진 등 20세기 초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에 의해 촬영된 사진들이 추가적으로 공개됨에 따라 구리개 제중원의 현황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사실 확인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기존의 연구가 제중원으로 사용될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주로 초점을 맞춰왔기에 그 이후 제중원으로 사용되던 건축물이 짧게는 십 수 년에서 수십 년에 이르기까지 다른 시설로 활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며, 언제까지 제중원으로 사용될 당시의 건축물들이 잔존하였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제중원 그 이후 그 건축물이 남아 활용된 상황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연구는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의 분석과 제중원 이전(移轉) 이후의 활용 양상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재동 제중원과 구리개 제중원에 대해 기존에 알려져 있는 내용들을 수정·보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정확한 수치에 근거한 지적도나 도면의 정보들과 건축학적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재동 제중원과 구리개 제중원이 가지고 있는 의료사적, 사회적 의미 외에도 도시적, 건축적 측면에서의 분석 역시 시도해보고자 한다.

2. 재동 제중원의 배치와 공간구성

「재동 제중원의 규모와 확대과정」(박형우 외, 2000) 연구에서는 문헌 기록들에 근거하여 재동 제중원의 위치에 대한 면밀한 검증을 시도하며, 알렌의 기록과 경기여고, 창덕여고 시절의 졸업생들의 기억, 그리고 백송의 위치에 근거하여 그 위치를 재동 35번지로 추정하고 있다. 알렌의 기록에 따르면, 재동 제중원은 홍영식의 집이었으며(알렌·김원모역, 1991: 67) 홍영식의 집은 외아문 북쪽의 두 번째 집이었다[3]. 또한 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와 창덕여자고등학교의 기숙사 건물로 기존의 재동 제중원이 사용되었는데, 이 기숙사가 위치하였던 곳이 현재의 재동 35번지이다. 재동 35번지 경계에 백송이 위치하고 있음 역시 재동 35번지가 재동 제중원의 위치임을 밝혀주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박형우의 연구에서는 2000년 당시 현재의 지적도에 1885년 6월경 알렌이 선교부에 보낸 ‘Medical Work in Korea’에 실린 배치도와 1886년도에 작성된 『제중원일차년도보고서』에 실린 배치도를 대입하여, 그 위치와 대지 내 건물 배치 상황을 밝혀내고 있는데, 이 두 개의 배치도들은 실제 측량에 의한 것이 아닌, 개념도와 같은 도면이기 때문에 사실상 정확한 비교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최근 일제시기건축도면 중 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의 기숙사 도면이 공개되어 제중원 건물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12년 제작된 『지적원도(地籍原圖)』, 1936년 지적 정보를 알 수 있는 『대경성정도(大京城精圖)』, 또한 1947년 촬영된 항공 사진 등과의 비교를 통해 좀 더 정확하게 제중원의 위치 및 그 내부 배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기숙사 도면들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제중원의 위치는 기존의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현재의 헌법재판소가 위치한 대지인 재동 83번지의 북측, 즉 재동 35번지의 위치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제중원 건물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4]의 기숙사 사감실 및 응접실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5], 1910년대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기숙사기타신축공사배치도(京城女子高等普通學校寄宿舍其他新築工事設計圖)[그림1]에 나타난 대지모양은 1912년 지적원도의 재동 35번지의 모양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어 제중원의 위치가 재동 35번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기숙사기타신축공사배치도
Fig. 1. Site Plan Drawing for the Construction of Kyungsung Women’s High School Dormitory in the 1910s
kjmh-25-3-373f1.gif
이를 바탕으로 1912년의 지적원도 위에 [그림 1]의 우측에 있는 도면인 재래배치도(在來配置圖)를 겹치고 현재의 백송 위치를 표시해 보면, [그림2]와 같다. 이를 통해 백송과 기존의 건축물들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으며,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의 기숙사 일부로 사용되었던 부분이 제중원에서 어느 위치였는지를 추정할 수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의 기숙사의 일부로 사용되었던 제중원 건축물의 일부에 대해 박형우는 1886년 배치도의 일반병동 및 안과병동(1885년의 외과병동, 1886년 배치도에서의 7,8번) 부분이며 백송은 부인병동(배치도의 9번) 앞의 정원에 있었을 것이라 추정했으나(박형우 외, 2000), 황상익은 백송의 위치는 뒷 정원(배치도의 21번)에 있었던 것으로, 건물은 특별병동(배치도의 14번) 이었을 것으로 이견을 보인다.(황상익, 2013: 221-229)
그림 2. 1912년 지적원도 위에 중첩시킨 재래배치도(在來配置圖)
Fig. 2. Existing Layout of Kyungsung Women’s High School Dormitory Overlayed on the Map of 1912
kjmh-25-3-373f2.gif
우선 백송의 현재 위치를 『제중원일차년도보고서』에 실린 1885년과 1886년의 배치도에 대입하여 생각해보면, 백송은 부인병동의 서남쪽에 있는 나무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2차년도 보고서인 1886년 약도에는 Sacred Tree라는 표기가 특별병동의 북측에 있으나, 현재 백송의 위치를 생각해볼 때 이는 백송이 아닌 다른 나무를 일컫는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백송의 위치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기숙사 배치도면에서 나타난 재래가(在來家)의 위치 등으로 미루어보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기숙사의 사감실과 응접실로 사용된 제중원 건물은 일반병동 및 안과병동(7,8번)이라는 박형우의 의견이 좀 더 타당하다. 1932년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앨범에서 기숙사 부분이 촬영된 사진인 [그림5]를 보면 제중원 건축물의 일부로 예상되는 한옥의 오른편으로 일식 지붕이 있는 긴 복도같은 건축물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기숙사의 신축도면에서 ‘재래’라고 쓰인 부분의 동측에 있는 일자형 건축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6]의 제중원 건축물은 5칸 규모의 한옥으로, 송인호의 연구에서 지적했듯,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기숙사기타신축공사설계도에서 전면 5칸 규모인 40자(약12m) × 약13자(약3.9m) 규모의 동측 일부분([그림2]의 빗금친 부분)으로 추정된다.(송인호, 2015: 145) 따라서 사진 속에 등장하는 제중원 건물은 본래 독립적인 건물이었다기보다는 서측 부분이 철거되며 이 부분만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6]. 1886년 배치도에서 7번 안과병동과 8번 일반병동은 나란히 연결되어 ㅡ자형을 보이기 때문에, 재래가배치도에서 보이는 ㄴ자 형태와 차이점을 보이나, 이는 1885년의 배치도에서는 7번 외과병동과 8번 일반병동이 ㄴ자형으로 접하고 있으므로 형태상으로도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1885년과 1886년의 배치도가 모두 측량도면이 아닌 데에서 기인하는 문제점으로 볼 수 있다.
그림 5. 1932년의 제중원 건물
Fig. 5. Jaedong Jejungwon Building in 1932
kjmh-25-3-373f5.gif
그림 6. 1934년 당시의 재동 제중원 건물
Fig. 6. Jaedong Jejungwon Building in 1934
kjmh-25-3-373f6.gif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기숙사의 사감실과 응접실로 사용되었던 제중원 건축물([그림2]의 빗금친 부분)이 1886년 배치도에서의 안과 및 일반 병동이라 가정하면, [그림7]과 같이 재래배치도의 실측 도면에 근거하여 재동 제중원의 1886년 당시의 배치도를 다시 작성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각 공간의 위치 및 크기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추정이 가능하다. 일반병동 및 안과병동이 전면 5칸 규모인 40자(약 12m) × 약13자(약 3.9m) 규모이므로 이에 맞춰 도면을 그려보면 그 서측편 연결된 동들은 예방접종실과 화장실 및 특별병동임을 알 수 있다. 1886년 배치도에서의 각 공간간의 관계와 상대적인 크기 등을 비교해볼 때 전체 5칸 규모 중 4칸은 일반병동, 1칸은 안과병동이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며, 측면으로도 1칸 앞에 0.5칸의 마루공간이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림6]의 사진으로 미루어 보아 전면 툇마루 공간은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는 내부 복도가 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1886년 배치도에는 ‘Veranda’라고 기록되어 있어 1886년 당시에는 여전히 외기에 노출된 툇마루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렇게 크기를 산정한 것을 바탕으로 재래배치도에 남아있는 재래가에 1886년 배치도의 공간을 대입하여 보면, 일반병동 서측으로 1칸 규모의 화장실과 2칸 규모의 예방접종실이 이어지며, 그 옆으로 전면 3칸×측면2칸 규모의 특별병동이 위치하였을 것임을 예상해볼 수 있다. 다만, 담장이 없어지고 공간들이 합쳐지는 과정에서 예방접종실과 화장실의 남측과 일반병동 서측의 툇마루는 사라졌으며, 별도의 공간으로 구획되었던 특별병동은 예방접종실과 복도로 이어져 특별병동-예방접종실-일반병동으로 이루어지는 재래배치도 중심의 일자형의 건축물을 형성하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안과병동 동측에도 역시나 1칸 규모의 암실과 사무실이 이어지며, 외부공간을 지나 외래진찰실과 대기실과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외래진찰실은 1886년 배치도에서 안채와 맺고 있는 관계를 고려해볼 때 전면 3칸×측면 3칸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안채와의 사이에 툇마루 등이 놓여 공간이 서로 연결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1885년 배치도에서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구분되어 있음과 대조적인 것으로 신발을 벗지 않고 바로 대기실→외래진찰실→병동부분으로 동선 이동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 1885년과 1886년 사이에 개조한 부분으로 추정된다.
그림 7. 1886년 재동 제중원의 배치도(추정)
Fig. 7. Layout of Jaedong Jejungwon in 1886 (Estimation)
kjmh-25-3-373f7.gif
병동 및 진료 공간을 제외한 부속채들의 현황을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다. 동측의 대지를 따라 길게 일자형으로 생긴 건축물은 그 위치상 1886년 도면에서의 16번, 즉 하인처소의 위치로 예상된다. ㄱ자형으로 꺾인 북측부분과 대지경계선으로부터의 간격 등을 고려해볼 때 15번의 전염병동이라기 보다는 16번의 하인처소의 위치일 것이라 예상되며, 이 역시 1칸 규모이다. 북측의 요철이 있는 ㄷ자형에 가까운 건축물은 의학교가 위치했던 위치로 파악되며 1886년 도면에서의 30-31-32가 연결된 부분일 것이라 예상된다. 다만 1910년 재래배치도에서는 의학교 남측 사무실과 김치 저장소 등의 건물은 멸실된 상태로, 학생 숙소와 화학실험실, 강의실이 모두 연결되며 증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부분의 경우 건물의 형태가 다소 상이하게 나타나며 사무실과 강의실 남측 학생숙소 사이의 빈 공간 등이 거의 확보되지 않으므로, 의학교 부분은 제중원 이전(移轉) 이후 대규모 증축 혹은 철거 후 신축 등이 이루어졌을 가능성 역시 생각해볼 수 있다. 재동 제중원 부지를 1906년 광제원으로 사용할 당시 시험소와 수술시험소 2개소를 증축했다는 기록[7]에 근거하여 생각해 보면, 대지의 북측인 의학교 부분은 이 당시 증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재래가배치도에서는 재래가 부분이 서측 대지경계까지 맞닿아 있어, 1885년과 1886년 배치도상에서 나타나는 특별병동 서측의 정원 부분이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1885년과 1886년 배치도 상에서 특별병동 서측의 정원이 과도하게 크게 그려졌을 가능성과 서측 정원은 현재의 윤보선 가옥의 남측 일부였을 가능성을 검토해볼 수 있으나, 현재로서는 이를 증명할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재동 제중원의 배치와 건축적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홍영식의 집을 수리하여 사용한 재동 제중원은 ㅁ자형의 안채와 안채에서 연결되는 사랑채의 구조를 가진 형태의 건축물이 전체 대지의 중심에 위치하며 이 곳에 일반병동, 안과병동, 부인병동, 예방접종실 등이 위치하고 있다. 안채의 동측으로 돌출된 세 방향으로 툇마루가 부착된 사랑채 부분은 남측의 주출입구와 연결되는 환자 대합실과 진료소가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복도 공간을 통해 연결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궁이의 위치로 미루어 보아 세 방향으로 툇마루가 부착된 대합실 공간의 경우 원래 누마루였을 가능성이 크며, 그 뒤편 진료소 공간은 온돌방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마찬가지로 아궁이가 있는 예방접종실, 여성병동 및 부엌과 연결된 일반병동, 안과병동 역시 온돌방이었을 것이라 예상된다. 즉, 난방이 필수적이었을 병동 공간들은 대부분 아궁이가 있는 온돌방이었을 것이라 예상되며, 일반병동과 예방접종실 사이 그리고 외래진료소 후면에는 내부화된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라 예상된다.
병동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안채와 외래공간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사랑채의 남측과 동측에는 대지경계선을 따라 부속채들(행랑채들)이 장랑(長廊)의 형태로 위치하고 있다. 특히 동측 대지 경계선에 인접하여 설치된 바깥 행랑채에는 전염병동이 위치하여 제중원 내 다른 공간들과 분리되어 있으며, 대문 주변에는 문간방과 경비 처소 등이 배치되어 있다. 한편 특별병동 및 의학교 공간은 주건물과는 분리되어 다른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1886년의 제중원은 담장에 의해 병동공간인 안채영역과 별채(특별병동)영역, 외래공간인 사랑채영역, 전염병동 및 서비스공간인 대문간 영역 및 의학교가 있는 의학교 영역의 5개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구성되어 있었으나 제중원의 이전 이후 담장들이 철거되어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기숙사 신축이 계획될 당시인 1910년대에는 영역의 구분이 없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안채-사랑채-별채는 모두 연결되어 하나의 건물군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886년 제중원이 구리개로 이전한 후 재동 제중원 부지와 건물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재동 제중원 부지에 대한 언급이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1900년의 것으로, 1900년 10월 중추원이 광제원으로, 헌병사령부가 중추원으로 이동하며 광제원은 재동 제중원 부지로 이전하였다는 정부 기록[8]과 신문광고 등이 있어[9] 1900년 10월 경 광제원이 재동 제중원 부지로 이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00년 이전 당시 광제원은 기존의 가옥을 구매하여 수리하여 사용하였는데[10], 당시 사용한 건축물들은 이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시절의 기록들에 미루어보아 제중원 당시의 건물들로 추정된다. 1906년 6월에는 27,805원 48전 2리를 들여 광제원을 확장하고[11] 시험장 및 수술시험장 두 개소를 설치하였다[12].
광제원이 1906년 12월 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된 이후 제중원 건물은 1910년 대까지 두묘제조소로 사용되다 이후 1910년대에 들어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가 재동 제중원 건물을 언제부터 기숙사로 사용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1910년 8월 관립여학교[13]가 인근 재동 83번지로 이전해온 시기 이후일 것이라 추정된다. 1908년 3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는 제중원 부지에 기숙사를 설치하고자 하였다가[14] 실현하지 못하였으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가 재동 83번지에 자리잡게 되며 자연스럽게 인접한 부지인 재동 35번지에 기숙사가 자리잡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15]. 결국 재동 제중원이 1886년 구리개로 이전한 이후, 1900년까지의 사용용도는 알 수 없지만 1900년 이후에는 광제원, 1907년 이후에는 두묘제조소로 사용되었음은 명확하며, 1910년 이후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의 기숙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10년대 후반 이후에는 분명하게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의 기숙사로, 1945년 이후에는 창덕여자고등학교에서 사용하다 1950년대 후반 교사 증축과 함께 멸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광제원은 1900년 재동 제중원 자리로 이전한 이후 제중원 부지 내의 기존 건물을 수리하여 사용하였으며, 1906년 이후에는 시험소와 수술시험소 2개의 건물을 신축하여 사용하였다. 이후 두묘제조소 등으로 사용될 당시의 수리나 신축 기록은 발견되지 않으며, 1910년대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기숙사의 재래배치도를 통해 확인되는 바를 통하여 광제원 시절 사용하던 종래의 제중원 건축물이었을 건축물과 광제원 시절 신축된 건축물을 추정해볼 수 있었다. 따라서 재동 제중원의 경우 그 건물과 부지가 이후 활용된 양상의 연구를 통해 원형의 물리적 실체에 좀 더 가까이갈 수 있었으며, 이후 1886~1900, 1910년대 초중반의 불분명한 시기의 사료가 확보되면 좀 더 정확한 추정이 가능할 것이다.

3. 구리개 제중원의 입지 및 공간 구성

구리개 제중원은 선행 연구들에서 밝혀졌듯이, 지금의 을지로와 명동길 사이, 즉 1912년 당시 지명으로는 황금정 2정목 193번지와 명치정 2정목 3번지를 포함하는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몇 동의 한옥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구리개 제중원의 건물에 대하여서는 사진 2장 외에는 자료가 없어 그 물리적 실체에 대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였으며, 제중원이 이전해 나간 이후에 대하여서도 면밀하게 검토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성 베네딕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소장의 1900년대 초반 서울사진 등이 추가로 공개되었고, 주변 지역인 훈도방의 신식호적(1906년 작성)이 공개됨에 따라 구리개 제중원으로 사용될 당시의 부지 및 건물 현황에 대해 좀 더 면밀하게 검토가 가능해졌다.
「구리개 제중원의 규모와 활동」(왕현종 외, 2001)에서는 당시의 지도들과 『미국여의사가사구매계약서급지적도』[16], 지적목록의 정보들을 바탕으로 구리개 제중원의 부지를 최소 황금정 2정목 193번지의 약 1,810평의 대지 그리고 최대 변의 황금정 2정목 168번지, 192번지 및 명치정 1정목 4번지, 5번지, 6번지를 포괄하는 5,036평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정은 제중원 이전 이후 그 부지를 사용한 귀족회관이 있었던 위치와 『미국여의사가사구매계약서급지적도』에서의 정보 및 지적목록에서 국유지 혹은 준국유지인 대지들의 정보에 근거한 것으로, 새로 발견된 사진 자료 및 『미국여의사가사구매계약서급지적도』에서의 수치 정보를 참고하여 다시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우선적으로 이 집의 위치는 『미국여의사가사구매계약서급지적도』[그림 8]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적도의 정보에 따르면 미국여의사(에바필드)가 구매한 대지는 명동 성당 북측 길 건너편에 위치하였으며, 명동성당 앞길과 명동성당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만나는 모서리의 대지에 위치하였다. 이는 1900년대 초에 촬영된 사진인 [그림9], [그림10]에서도 확인 가능한 것으로, 명동 성당의 북동측에 에바필드의 집이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집은 1898년경 촬영된 명동성당계단공사 사진인 [그림11]에서 보이는 초가집과 밭이 있는 부분, 『미국여의사가사구매계약서급지적도』에서 붉은 색으로 칠해진 부분에 신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여의사가사구매계약서급지적도』가 1899년의 문서이고, 성 베네딕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소장의 사진이 약 1900년대 정도에 촬영된 것이기 때문에 1899년 매매 이후 에바필드가 서양식 조적조 1층 건축물을 신축하였을 것임을 예상해볼 수 있다.
그림 8. 미국여의사가사구매계약서급지적도
Fig. 8. Contract for the Sale of the Property and House, and a Land Registration Map for Eva H. Field
kjmh-25-3-373f8.gif
그림 9. 명동성당 주교관에서 바라보는 장면
Fig. 9. Street Scene Viewed from the Myeongdong Cathedral
kjmh-25-3-373f9.gif
그림 10. 명동성당과 에바필드집 사이 도로
Fig. 10. Street between House of Eva H. Field and Myeongdong Cathedral
kjmh-25-3-373f10.gif
그림 11. 명동성당 계단공사 당시의 모습
Fig. 11. Construction Work of Stairway, Meyongdong Cathedral
kjmh-25-3-373f11.gif
또한 이 지적도에는 수치정보가 나와 있어 지적의 규모를 예상해볼 수 있는데,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자세히 살펴보면 동측의 밭으로 표현된 부분과 서측의 건축물이 있는 대지로 구분되어 있다. 각각의 크기는 132척(약 40m)×70~82척(약21.21~24.85m)과 80척(약24.24m)×62척(약18.79m)이며 대지 동측의 길은 당시 본정(진고개)길과 영락정1정목길을 잇는 즉, 현재의 충무로 2가와 저동 1가를 잇는 길이다. 1912년 지적원도에 이 내용을 대입시켜 보면, 명치정 1정목 1번지의 남측변 길이는 40m보다 짧아 에바필드가 소유한 부지는 명치정 1정목 1번지보다 더 서측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1번지의 서측 막다른 길을 포함한 남측변 길이는 약 40m, 그리고 5번지까지를 포함하면 남측변 길이가 약 60m 정도로, 미국여의사가사구매계약서급지적도에서 붉은 색으로 표현된 부분의 동측, 즉 밭이 있던 대지가 명치정 1정목 1번지의 남측 일부[17], 그리고 서측의 가옥이 있던 대지가 명치정 1정목 5번지[18]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주변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명치정 1정목 1번지 에바필드 소유부지의 북측에는 헐버트의 밭이, 그리고 명치정 1정목 5번지 에바필드 소유부지의 북측과 인접한 대지에는 서참판의 집, 이 집의 북측에는 에비슨의 집이 표현되어 있다. 이를 통해 명치정 1정목 1번지에는 에바필드 소유부지와 헐버트의 밭이, 그리고 명치정 1정목 5번지의 남측에는 에바필드가 구매한 가옥과, 그 북측에는 서참판집이 있을 것임을 예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북측대지인 6번지 혹은 4번지에는 에비슨의 집이 있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구리개 제중원의 규모와 활동」(왕현종 외, 2001) 연구에서는 명치정 1정목 1번지의 남측 일부를 에바필드 소유부지로, 그리고 2번지를 헐버트의 밭, 3번지를 에비슨의 집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실제 이 지적도에 나타난 수치와 1912년 지적도 및 현재의 지적도 상의 실제 거리를 비교해봤을 때, 에바필드의 소유부지는 명치정 1정목 1번지와 5번지의 남측 일대에 이르는 것이었으며, 헐버트의 밭은 역시 명치정 1정목 1번지의 북측 일대에, 그리고 에비슨의 집은 명치정 1정목 4번지나 6번지에 있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으며, 1912년 지적도에서 나타나는 명치정 1정목 1번지와 5번지 사이의 막다른 골목은 에바필드가 이 대지를 소유한 이후, 에비슨의 집으로 가기 위한 길을 만들었을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다. 『미국여의사가사구매계약서급지적도』에서 에바필드가 구매한 토지인 붉은 색 부분을 실제 수치에 맞게 그려 1912년 지적원도 및 현재의 수치지도에 대입시키면 [그림12]와 같다.
그림 12. 1912년 지적원도 위에 표시된 에바필드 매매 토지
Fig. 12. Property of Eva H. Field marked on the Map of 1912
kjmh-25-3-373f12.gif
1890년대 말 명동성당 혹은 남산에서 구리개 제중원 일대를 촬영한 성 베네딕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소장의 사진을 검토함으로서도 에비슨의 집이 명치정 1정목 4번지의 위치에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림 13]의 왼쪽 하단에 있는 명동성당 입구 건너편의 명치정 1정목 1번지에 위치한 미국인 여의사 에바필드의 집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서측 언덕에 한옥 한 채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명동성당의 담장에 난 정문과 에바필드 집 위치를 고려해 봤을 때, 이 언덕 위의 한옥이 명치정 1정목 4번지에 위치한 에비슨의 집임을 확인할 수 있다[19]. 한편, 명동성당의 문과 마주하고 있는 큰 규모의 한옥은 명치정 1정목 6번지일 것으로 예상된다. 남산 위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14]을 통해 에바필드의 집과 에비슨의 집, 그리고 명치정 1정목 6번지의 한옥과의 관계를 다시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이 사진에서도 분명히 에비슨의 집은 에바필드의 집 바로 북측편이 아닌, 에바필드의 집과 명치정 1정목 6번지의 대규모 한옥의 중간 지점 정도의 북측 부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림 13. 명동성당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촬영한 사진.
Fig. 13. Street Scene Viewed from Myeongdong Cathedral
kjmh-25-3-373f13.gif
그림 14. 남산에서 명동성당과 구리개 제중원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
Fig. 14. Street Scene Viewed from Namsan Mountain
kjmh-25-3-373f14.gif
1894년 9월 7일 실 공사(John MB Sill)의 제중원 운영권에 관한 제안서에는 “그는 필요한 수리를 하고 병원 뒤쪽의 언덕 위 빈 터에 자신이 거주할 건물을 지을 것이며, 이들 집과 부지는 병원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이어진 김윤식의 회답에는 “소유하고 있는 제중원 내의 빈 터에 그가 거주할 건물을 짓는 것을 우선 수락하는 것도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라는 기록이 있어[20], 에비슨의 집은 구리개 제중원 뒤편 언덕 위에 1894년 이후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집에 대해서는 1905년 하야시 공사의 제안 내용에서도 “이 곳 高地에있는 기와집 한 채는 (외부)顧問官이 거주토록 하고 다른 한 채와 畿部의 空地는 大東俱樂部로 만들며 低地에 있는 家屋全部는 貴政府가 임의로 사용한다면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언급하고 있어[21] [그림13], [그림14]에서 보이는 언덕 위의 기와집이 에비슨의 집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상의 언덕 위의 기와집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이 지역의 지형도를 지적도에 겹쳐보면 [그림15]와 같아서 실제로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이 명치정1정목 4번지임을 알 수 있으며, 아울러 명치정1정목 4번지와 황금정2정목 193번이 사이는 급경사임을 확인해볼 수 있다.
그림 15. 구리개 제중원 주변 현황
Fig. 15. Site Condition around Gurigae Jejungwon
kjmh-25-3-373f15.gif
언덕 위에 위치한 에비슨의 집은 기존에 공개되어 있던 구리개 제중원을 찍은 두 장의 사진에서도 확인된다. 1897년 촬영된 사진으로 알려진 [그림 16]에서 사진 왼쪽 언덕 위의 단층한옥과 또한 이 언덕 위에서 구리개 제중원의 후면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인 [그림17]에도 사진 왼쪽 끝에 급경사로 오르는 언덕 위의 단층한옥의 일부가 촬영되어 있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제중원의 다른 건축물들은 명치정 1정목 4번지보다 더 북측이면서 저지대인 황금정2정목 193번지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그림 16. 저지대쪽에서 찍은 구리개 제중원
Fig. 16. Gurigae Jejungwon Viewed from Northern Side (Lower Site)
kjmh-25-3-373f16.gif
그림 17. 언덕 위에서 찍은 구리개 제중원
Fig. 17. Gurigae Jejungwon Viewed from Southern Hill
kjmh-25-3-373f17.gif
또한 1907년 『최신경성전도』에는 에비슨의 집이 있었던 명치정 1정목 4번지의 위치에 광무기관관방(鑛務技官官房)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광무기관관방은 농상공부 광상기감(礦床技監)인 고치베(巨智部忠承)의 광물표본진열소를 일컫는 것으로 구리개 제중원 이전 이후 외부고문이 사용하던 에비슨의 집에 1906년 이후 설치된 것이기 때문에[22] 에비슨의 집 위치는 명치정 1정목 4번지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명치정1정목 4번지와 황금정2정목 193번지를 연결한 부지의 형태는 1910년 경성시가도에서 농상공부라 표현되어 있는 부지의 형태와 거의 유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명치정 1정목 4번지와 황금정 2정목 193번지에 설치된 구리개 제중원은 언덕 위에는 한옥 한 채가 있었으며, 그 아래 부분에는 단층 한옥들이 서로 연결되어 복합체를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16]에 나타난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황금정 2정목 193번지의 동측에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한옥이 위치하며, 지붕 모양으로 보아 두 개의 건물이 연속적으로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림17]을 통해 대지의 남측변을 따라 배치된 한옥의 경우 후면으로 2칸 정도의 한옥이 돌출되어 있으며 서측으로 더 건축물이 이어지고 후면으로 돌출한 부분도 더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리개 제중원의 경우 선행 연구에서 밝혔듯이 점차적으로 인근 민유지를 매입하여 부지를 확장해 나갔고 시설을 확충해 나감으로 그 과정에서 여러 채의 건물들을 증축되고 개조되었을 것임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구리개 제중원에는 병원으로 사용되는 건물과 에비슨의 집 외에도 의학 교육을 위한 공간과 의학교 학생, 병원 스탭의 숙소와 교회로 사용하는 공간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명치정 1정목 4번지와 황금정 193번지 인근 부지들도 제중원의 부지로 편입되었을 것임을 예상해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에바필드의 집과 밭은 명치정 1정목 1,5번지에 위치하였고 그 북편에는 헐버트의 밭이 있었다. 한편 1912년 토지조사서와 1917년 지적목록에 근거하여 제중원이 위치한 인근 부지의 현황을 살펴보면, 명치정 1정목 1,3,5,6번지, 황금정 2정목 168, 193번지는 모두 국유지, 명치정 1정목 4번지는 이왕직(창덕궁) 소유이다. 한편 황금정 2정목 169, 170번지와 191번지는 윤덕영(尹悳榮)의 소유이다.
기존연구(왕현종 외, 2001: 142-144)에서는 “한 때 이 집에는 조선인 王族이 살고 있었다고 했으나”(Avison, 1984: 170)라는 에비슨의 기록과 宣祖의 셋째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집이 한성 판윤 윤치의(尹致羲, 윤용선의 아버지)의 집이 되었다는 중구지의 기록(서울특별시중구, 1994: 248-249)에 근거하여 제중원 부지가 원래 윤용선(尹容善)의 저택이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동아일보』 1923년 6월 15일 기사[23]에서도 제중원의 위치에 대해 귀족회관 뒤 경운궁 자리에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어 제중원이 왕족 소유의 부지에 설치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으며, 1912년 토지조사서 및 1917년 지적목록에서 제중원 인근 부지인 황금정 2정목 169, 170번지와 191번지가 윤용선의 손자인 윤덕영의 소유임을 생각해 볼 때 이와 인접한 대지이며 1912년 당시 국유지인 황금정 2정목 168번지 및 명치정 1정목 3번지가 기존 윤용선의 저택 일부였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1900년대 초반 사진에서도 명치정 1정목 6번지에 대규모의 한옥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 이 곳이 윤용선의 저택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24].
그림 20. 구리개 제중원의 예상 부지
Fig. 20. A Building Site of Gurigae Jejungwon (Estimation)
kjmh-25-3-373f20.gif
확실하게 제중원의 부지로 확인되는 것은 에비슨의 집이 있는 명치정 1정목 4번지와 저지대의 병원 건물들이 있는 황금정2정목 193번지이므로, 제중원 부지의 최소면적은 2,133평임이 확인된다. 한편 1905년 조선정부는 미선 교부와 협정하여 30,289원 90전으로 제중원 부지와 가옥을 반환받았는데[25] 당시 반환받은 토지들이 국유지로 남았을 것이라는 가정한다면 제중원 부지의 최대 면적은 에바필드의 가옥과 부지를 제외한 황금정 2정목 168번지와 명치정 1정목 3,6번지까지를 포함하는 4,620평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구리개 제중원의 경우, 선행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1905년 이후 외부고문관 스티븐스의 관사 및 대동구락부의 부지로 전용되었다. 1905년 4월 26일 『황성신문』의 기사를 통해[26] 실제 제중원의 환수가 이루어진 이후 제중원 부지 내의 이층 양옥은 외부고문관 스티븐스(Stevens)의 관사로, 그리고 나머지 부지는 대동구락부로 정하고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1905년 3월 하야시의 첫 제안과 달라진 내용들이 발견된다. 하야시의 첫 제안에서는 의사 숙소로 사용하던 높은 지대의 기와집을 스티븐스의 관사로 전용하고, 다른 한 채와 공지는 대동구락부가, 그리고 나머지는 조선 정부에서 사용하게 한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황성신문』에서는 2층 양옥을 스티븐스의 관사로 나머지는 전부 대동구락부가 사용한다고 언급하고 있어 정보가 서로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1900년대 초반 촬영된 [그림16]을 통해 확인해보아도 구리개 제중원 일대에 2층 양옥은 발견되지 않으며, 앞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사 숙소 즉 에비슨의 집은 명치정 1정목 4번지, 즉 높은 지대에 위치한 건축물이 분명하므로 『황성신문』의 기록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남은 부지는 전부 대동구락부로 사용되었다는 『황성신문』의 기사에 근거하면 황금정 2정목 193번지, 즉 제중원의 병원건물이 있었던 부지와 명치정 1정목 1번지와 5번지의 에바필드 집과 부지 역시 대동구락부의 부지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예상된다.
스티븐스의 관사로 전용된 에비슨의 집은 1년 후인 1906년 농상공부의 광상기감(礦床技監)인 고치베(巨智部忠承)의 청에 따라 농상공부 광물표본진열소로 사용하게 되었다[27]. 1907년 경성박람회 역시 대동구락부 건물 및 고치베의 광물진열장 그리고 그 부근의 땅을 차입하여 부지로 삼았다고 하고 있어(경성거류민단역소, 2010: 285-288) 스티븐스의 관사는 1907년 현재 고치베가 주로 사용하던 농상공부 광물표본진열소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대동구락부에 대하여서는 『만세보』 1906년 10월 31일자 기사에 “대동구락부는 이만팔천원을 비용하야 동현에 신축하고 그설비장식등을 편히 일만원을 요구하였는데... (중략) ... 그 구락부에는 대동구락부와 궁내부어용저라고 두 개의 간판을 붙인다더라” 라는 기사가 실려 있어 1906년 대동구락부 부지 내 신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동구락부를 1906년에 신축하였다는 것은 1907년 9월 6일과 7일 『황성신문』의 「博覽會記」 기사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박람회장 내부에는 총 572평 규모의 5개의 진열관, 연예관, 식물원, 그리고 한옥 사랑 1칸 등이 있었다[28].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구리개 제중원 부지에는 반환 이후 대동구락부가 신축됨으로서, 제중원으로 사용될 당시의 건물들은 멸실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고치베의 광물표본진열소로 사용되던 에비슨의 집이 경성박람회장 내의 한옥사랑 1칸일지 아니면 이 역시 이 시기에 멸실되었을지는 확실치 않으나 1920년대 이 지역의 전경 사진 등에서는 같은 위치에 서양식 건축물이 있는 것이 발견되므로 이 역시 경성박람회 당시 혹은 그 이후 이 역시 멸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박람회 이후 황금정 2정목 193번지는 농상공부가 사용하였으며, 1911년부터는 귀족회관으로 사용되었다.

4. 결론

재동 제중원과 구리개 제중원은 한국의 근대의료가 처음 시작된 곳으로, 그 건축물들은 한옥건축을 활용하여 병원건축으로 사용된 한국의 근대의료시설의 초창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의 기록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 물리적 실체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동 제중원과 구리개 제중원의 위치와 규모, 건물 현황 등에 대해서 의미있는 연구 성과들이 그동안 축적되어왔으며, 다행히도 최근에 발굴된 도면 및 사진 자료들을 통하여 재동 제중원과 구리개 제중원의 상황에 대해 좀 더 면밀한 검토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재검토하고 새롭게 발견한 자료들의 분석을 더하여, 재동 제중원과 구리개 제중원의 물리적 실체에 좀 더 다가가고자 하였다.
먼저, 재동 제중원에 관하여서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의 기숙사로 사용될 당시 작성된 도면(재래배치도) 분석을 통해 재동 제중원의 위치 및 배치 현황에 대해 파악함으로써, 기존의 연구에서 모호하거나 이견이 있었던 부분들에 대해 정리할 수 있었다. 대지 내 위치와 백송, 주변 건물들과의 관계를 고려해보았을 때,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기숙사로 사용된 제중원 건물은 재동 제중원 시절의 안과병동 및 일반병동(1886)에 해당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기숙사의 사감실 및 응접실로 사용되던 안과병동 및 일반병동의 크기가 전면 5칸 규모인 40자(약 12 m) × 약 13자(약3.9 m)정도임에 근거하여 수치에 근거하여 1886년 당시의 배치도를 재작성하였다. 재동 제중원은 구리개로 이전한 이후, 약 14년간의 용도는 확인되지 않으나, 1900년 이후에는 광제원이 일부 건물을 수리하고 신축하여 사용하였고, 1906년 12월 이후에는 두묘제조소로 활용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910년대부터는 이 곳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의 기숙사로 사용하였는데, 1910년대 말, 이전 제중원 건물을 수리하여 활용한 것으로 예상되던 광제원 건물들이 대부분 멸실되고 사감실 및 응접실로 사용된 일부 건물만 남은 것으로 예상된다.
구리개 제중원의 경우 기존의 연구에서 분석된 내용들을 바탕으로, 그 부지와 건축물 현황에 대해 좀 더 면밀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구리개 제중원 내 병원의 위치는 황금정2정목 193번지, 에비슨의 집은 명치정1정목 4번지였으며, 에바필드의 집은 명치정 1정목의 1번지와 5번지의 남측 일부라는 것을 밝혀 냄으로, 기존 연구에서 에비슨의 집은 명치정 1정목 3번지, 에바필드의 집은 명치정 1정목 1번지라는 내용을 수정·보완하였다. 또한 에비슨의 집은 명치정 1정목 4번지 언덕 위에 위치한 단층 한옥 건축물로, 1894년 이후 신축된 근대기 한옥임을 새로 발굴된 사진자료들에 근거하여 그 규모와 형태가 확인 가능하였다. 구리개 제중원은 1906년 대동구락부로의 용도 변경과 1907년 경성박람회를 거치며 기존의 건물들은 대부분 멸실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제중원은 서양식 근대의료를 처음으로 수용하고, 한국적 상황에 맞게 적용시키면서 한국의 근대 의료가 시작된 곳으로서, 한국 근대의료시설의 발전에 있어서도 그 시초가 되는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그런데 제중원에 관한 사료가 제한적이었으며, 건축학이나 도시학적 차원에서의 접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제중원의 물리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거나 혹은 오해되고 있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 연구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그동안의 잘못된 사실들을 바로잡고 새로 발굴된 자료들을 통해 파악하게 됨 점들을 더하여 제중원의 물리적 실체에 더욱 다가가고자 하였다. 향후 한옥건축으로서의 제중원의 가능성 및 비슷한 시기 한옥 건축물에 설치된 근대 병원들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근대 초기 한국적 상황에서 근대 의료시설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양상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Notes

1) 국가기록원은 일제시기 조선총독부에서 주도하여 건축한 지방청사,경찰서,재판소,검찰 지청,학교,형무소,병원,시험장,관측소 등 여러 공공건물과 전통건축물 등의 설계원도 26,000여매를 소장하고 있다. 이 중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서대문형무소,충청남도 청사,구 대구사범학교 본관 및 강당,서울시 청사 등의 건축물 설계원도 500여매가 포함되어 있다. 일반문서의 경우 건축회계 문서군에 107권,지방회계 문서군 중 영선관계에 10권이 있다. - 일제시기 건축도면 아카이브 http://theme.archives.go.kr/next/plan/viewMain.do

2) 이에 대하여서는 송인호가 2015년 “한국 근대의학의 기원과 연세 학술심포지움”에서 발표 한「제중원 한옥건축의 형식과 변용」(송인호,2015)에서 개략적으로 다룬 적이 있으며,이 동범이 지유건축사사무소의 복원 도면을 바탕으로 복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바가 있다.(이동범 외,2016)

3) “(乙菌二月)十八日…損示四門及鍾閣本衙門設有施醫院一所在北部齋洞外衙門北第二家邊美國醫師安連井置學徒醫藥諸具”(『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규장각 17836),고종 22년 2월 18일)

4)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는 1908년 설립된 관립한성고등여학교를 모태로 하는 것으로,현재의 경기여고이다. 관립한성고등여학교는 도렴동에서 개교한 후,1910년 현재의 헌법재판소가 있는 재동 83번지로 목조 2층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이후 1년 후인 1911년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고 경운동으로 이전하였으며,1923년 다시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며 다시 재동 83번지로 교사를 신축하였다. 여기에서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통칭하여 부르기도 한다.

5) “The KWANG HEI WON - ‘House of Extended Grace.’ Originally the residence This picture was taken in 1934. The building is now used as a dormitory by the Higher Common Schol for Korean Girls”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 1934: illustrations)

6) 이동범 역시 사진 속 제중원 건물이 일반병동일 경우 ᄆ자형 안채에서 좌우측 익각부를 떼 어내는 대대적인 개보수를 거쳤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이동범은 이 건물에 추녀가 설치 되어 있음을 근거로 부인병동을 이축했을 가능성 역시 언급하고 있으나 건물의 형태 및 규 모,백송과의 관계를 미루어볼 때 일반병동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좀 더 타당하다. (이동범,2016: 231-232)

7) “廣濟院에셔는 院務를 一層精密흐게 擔張흐기 爲흐야 該院內에 試驗場과 手術試驗場으로 兩場所I 設立次로 方在營始中이라더라”(『대한매일신보』,1906. 9. 28) ; “廣濟院에셔 事 務! 一層擔張 S 次로 院內에 試驗場과 手術施驗場을 設賣흐기로 方今工役을 營始 S 다더 라”(『황성신문』,1906. 9. 29)

8) 1900년 10월 2일의『照會』,제109호,제11◦호,제111호에는 중추원이 광제원으로,헌병사령부가 중추원으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다는 내용(奎17754)이,1900년 10월 12일의『照覆』제 8호에는 광제원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는 내용(奎17761)이 있다.

9) “廣濟院을 北署薺洞前外衙門上怪松비이집으로 移設흐앗오니 抱痛士女는 來臨흐시오 廣濟 院 告白”(『황성신문』,1900. 10. 13)

10) 1900년 10월 22일에는 광제원 이설을 위한 가사 구매비 3,000원과 물건운반비 100원,수리비 100원을 청구하였다. (奎 17715)

11) 奎 17704

12) “廣濟院에셔는 院務를 一層精密흐게 擔張흐기 爲흐야 設院內에 試驗場과 手術試驗場으로 兩場所I 設立次로 方在營始中이라더라”(『대한매일신보』,1906. 9. 28) ; “廣濟院에셔 事 務! 一層擔張 S 次로 院內에 試驗場과 手術施驗場을 設賣흐기로 方今工役을 營始 t 다더 라”(『황성신문』,1906. 9. 29)

13)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의 초기 명칭

14) “女校將設 學部에셔 本年度에 京城에 女學校를 新設롞기로 單定롞고 其學科校規를 規定 롞ꚬ 中인꟏ 入學者의 便宜를 爲롞야 京城內에 入學롣 子女가 多數히 居住롞ꚬ 處所를 選 擇롣 方針으로 調毠롡즉 上等社會의 女子가 女學校에 入學롣것이오 京城에셔 上等社會ꚬG 北村에 多有롡 故로 前廣濟院이 適當롬으로 因롞야 當局者가 交涉中이라더라 ”(『황성신 문』, 1908. 3. 7)

15)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는 신축 이전 다음해인 1911년 경운동으로 이전하였으나 그 부속보통학교는 여전히 재동의 기존 건물을 사용하였으며, 1922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가 돌아올 때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경운동 부지로 이전하였다. 경운동 부지는 협소하여 기숙사가 있긴 하였으나, 수용할 수 있는 규모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부속보통학교가 있던 재동 부지 인근의 기숙사를 1910년대에도 계속하여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6) 奎23191

17) 1번지에 해당되는 부분의 남북방향길이는 약 21-24m이나,명치정 1정목 1번지의 남북방향 길이는 이보다 훨씬 길이가 길어,에바필드 소유의 부지는 1번지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18) 또한 5번지의 남북방향 길이는 약 23m로,에바필드 소유의 서측 가옥이 있던 대지의 남북 길이 약 18m보다 길어서 서측 가옥이 있던 대지 역시도 명치정 1정목 5번지의 남측 일부임을 알 수 있다.

19) [그림 13] 속 언덕 위의 집은 그동안 언더우드의 집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한국문화홍보센 터,1989),본 연구에서 위치 확인을 통해 이 집은 언더우드가 아닌 에비슨의 집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20) 舊韓國外交文書- 美案. 濟衆院醫師懿丕信要求各條의 承認要請. 1894년 9월 7일 및 舊韓國 外交文書- 美案. 濟衆院醫師肉斐信提出條件의 承認. 1894년 9월 26일 (여인석 외,1998: 25)

21) 奎 18058

22) 奎 17703, 奎 17704 및 아래의『황성신문』기사에 관련 내용이 있다.

“礦監管屋 礦床技監巨智部忠承氏가 農商工部大臣에게 請願흐되 標品陳列處設置에 關흐 야 家屋이 無흐던 次에 大東得樂部隣家外交顧問煩知分氏의 官四가 最宣適當S 家屋이 g 기로 告흐얏더니 今般에 外交顧問官四가 別處로 移去흐오니 果若其然이면 先般陳列흐읍던 標 品의 殘留物이 尙存 S 則該家를 此際에 本官主管之下에 轉管케 흐라흐얏더라”(『황성신문』, 1906. 5. 1刀

23) 百萬名의 生命을 구조한 어비신씨의 공로」,『동아일보』, 1923년 6월 15일 3면.

24) 좀 더 이른 시기인 1903년에 작성된 신식호적(광무호적)의 경우 명례방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훈도방의 기록은 남아 있어 훈도방에 속하는 저동의 주소지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남아있는 훈도방 저동계 1,2통 22호(각 11호)의 호적 중 가장 큰 가옥(와가 257칸)의 소유주는 저동 1통 2호의 윤용구(尹用求)인데, 윤용구는 윤용선의 조카이자 덕온옹주의 부마인 윤의선의 양자이다. 윤용구 가옥과 윤용선 가옥의 연관성에 대하여 파악하기 위해, 훈도방의 호적 정보와 1912년의 영락정 1정목 및 황금정 2정목, 명치정 1정목의 저동 부근 정보를 비교해보았으나, 일본인들의 토지 매매가 활발했던 시기적 특성상 훈도방 1통 7호의 季領源의 주소지가 1912년 토지조사서에는 영락정 1정목 9번지인 것 외에 동일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통번이 연속하여 부여된다는 기존 연구결과(정정남, 2011)에 근거하여 보았을 때 이 근처의 대형필지이며 국유지인 영락정 1정목 1,2번지가 윤용구의 소유였을 것이라 예상해볼 수 있으며,이를 통해 대한제국기 훈도방 저동계의 호적 자료들은 구리개 제중원의 부지와는 크게 연관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1903년 신식호적자료는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근대호적팀 제공)

25)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는 1905년 3월 4일 높은 지대의 기와집 한 채는 고문관의 숙소로, 다른 한 채와 빈 터의 대부분은 대동구락부의 부지 및 부속 가옥으로 사용하고,낮은 지역에 있는 가옥의 전부는 조선 정부에서 사용할 것을 제안하며,제중원 부지를 조선정부에서 구매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공사 하야시의 요구가 있은 이후 1905년 4월 10일 조선 외무 대신 이하영과 미선교부 대표 빈튼이 제중원반환에 관한 약정서를 작성하여,조선 정부가 30,289원 90전으로 제중원 부지와 가옥을 반환받는 동시에 에바필드의 집과 부지도 구매하기로 하였으며,병원 건물과 에바필드의 집은 향후 1년간 더 사용하기로 하고 1,700원의 주택 임차료 및 이사비용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그러자 일본이 다시 나서 건물과 대지의 인도 기간을 단축함으로써 반환시기를 앞당기는 계약을 미국측과 계약하였고,이를 조선정부가 승인하고 1,700원을 지출하였다.(여인석 외,1998: 28-29)

26) “濟衆院을 我起에셔 三萬五千元에 賣收흐야 二層洋屋은 外部顧問官 煩知分氏의 官舍로 定 흐고 其餘는 大東得樂部로 議定흐고 方今 修理흐는되 役費 三千餘元을 度支에셔 支撥 t 다 더라”(『황성신문』,1905. 4. 26)

27) 奎 17703, 奎 17704 및 아래의 『황성신문』 기사에 관련 내용이 있다.

“紡監管屋 紡床技監巨智部忠承氏가 農商工部大臣에게 請願롞되 標品陳列處設置에 關롞 야 家屋이 無롞던 次에 大東俱樂部隣家外交顧問須知分氏의 官邸가 最宜適當롡 家屋이늼 기로 目賀田顧問과 協議롞고 昨年末에 幣原坦埀輿官과 連名롞야 林公使에게 該由를 通 告롞얏더니 今般에 外交顧問官邸가 別處로 移去롞오니 果若其然이면 先般陳列롞옵던 標 品의 殘留物이 尙存롡 則該家를 此際에 本官主管之下에 轉管케롞라롞얏더라”(『황성신문』, 1906. 5. 17)

28) 「博覽會記」, 『황성신문』, 1907. 9. 6 및 1907. 9. 7.

그림 3. 1885년 재동 제중원 배치도
Fig. 3. Layout of Jaedong Jejung in 1885
kjmh-25-3-373f3.gif
그림 4. 1886년 재동 제중원 배치도
Fig. 4. Layout of Jaedong Jejung in 1886
kjmh-25-3-373f4.gif
그림 18. 1907 최신경성전도
Fig. 18. Map of Kyeongseong in 1907
kjmh-25-3-373f18.gif
그림 19. 1911 경성시가도
Fig. 19. Map of Kyeongseong in 1911
kjmh-25-3-373f19.gif
Table 1.
Owners and Lot Area of Gurigae Jejungwon and Surrounding Area
지번 1912년 토지조사서 1917년 지적 목록 평수 비고
명치정 1정목 1번지 국유 국유 624 남측 일부는 에바필드의 집, 북측 일부는 헐버트의 집

명치정 1정목 2번지 安善中 28

명치정 1정목 3번지 국유 국유 710

명치정 1정목 4번지 이왕직 창덕궁 1,033 에비슨의 집

명치정 1정목 5번지 국유 149 에바필드의 집

명치정 1정목 6번지 국유 656

황금정 2정목 164번지 梅浦五一 136

황금정 2정목 168번지 국유 1,121

황금정 2정목 169번지 尹德榮 280

황금정 2정목 170번지 尹德榮 65

황금정 2정목 181번지 河村國太郞 三宅仲 136

황금정 2정목 191번지 尹德榮 81

황금정 2정목 192번지 福井もと 267

황금정 2정목 193번지 朴永孝외 1명 朴永孝, 閔泳徽 1,100

(1912년 토지조사서 및 1917년 지적목록의 내용 정리)

References

『各部請議書存案』 (奎17715).

『內部來文』 (奎17761).

『대한매일신보』.

『美國女醫師家舍購買契約書及地籍圖』 (奎23191).

『日案』 (奎18058).

『일제시기 건축도면 아카이브』.

『奏本』 (奎17703), (奎17704).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 (奎17836).

『漢城府戶籍』.

『황성신문』.

경성거류민단역소, 『경성발달사』, 박진우·오일환, translators. (서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서울역사박물관, 『(성 베네딕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소장) 서울사진』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2014).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지도』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2006).

서울특별시 중구, 『중구지』 (서울: 서울특별시 중구, 1994).

신 규환·박 윤재, 『제중원 세브란스 이야기』 (서울: 역사공간, 2015).

Allen Horace Newton, 『알렌의 日記 : 舊韓末 激動期 秘史』, 김원모, translator. (서울: 檀國大學校 出版部, 1991).

Oliver R Avison, 『舊韓末秘錄下』, 에비슨기념사업회, translator. (대구: 대구대학교 출판부, 1984).

한국문화홍보센타, 『한국의 백년』 (서울: 한국문화홍보센타, 1989).

허 영환, 『定都 600년 서울地圖』 (서울: 범우사, 1994).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 청사 건립지』 (서울: 憲法裁判所, 1994).

京城府, 『京城府史, 第2券』 (京城: 京城府, 1936).

同仁会 編, 『同仁会三十年史』 (東京: 同仁会, 1932).

長野末喜, 『京城の面影』 (京城: 內外事情社, 1932).

朝鮮硏究會 編著, 『大京城』 (京城: 朝鮮硏究會, 1925).

朝鮮總督府臨時土地調査, 『朝鮮土地調査事業報告書』 (京城: 朝鮮總督府臨時土地調査局, 1918).

陳內六助, 『京城府管內地籍目錄』 (京城: 京城共同株式會社, 1917).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30-4 (1934).

Allen HN, “Medical Work in Korea”, The Foreign Missionary 44 (1885).

Allen HN·Heron JW,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under the care of H N Allen and J W Heron for the Year ending April 10th 1886 (Yokohama: R. Meiklejohn & Co. Yokohama, 1886).

박 윤재, 『한말·일제 초 근대적 의학체계의 형성과 식민 지배』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박 윤재, 『한국 근대의학의 기원』 (서울: 혜안, 2005).

박 형우·이 경록·왕 현종, 「재동 제중원 규모와 확대과정」, 『의사학』 9-1 pp. 29-53.

박 형우,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 (파주: 21세기북스, 2010).

서울대학교 병원, 『사진과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 의료문화사: 1879-1960』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09).

송 인호, 「제중원 한옥건축의 형식과 변용」, 연세대학교 의학사연구소 지음, 『한국 근대의학의기원, 연세』 (서울: 역사공간, 2016).

신 규환, 「근대 병원건축의 공간변화와 성격-제중원에서 세브란스병원으로의 변화를 중심으로」, 『역사와 경계』 97-0 (2015), pp. 245-270.

신 동원, 『한국근대보건의료사』 (서울: 한울아카데미, 1997).

여 인석·박 윤재·이 경록·박 형우, 「구리개 제중원 건물과 대지의 반환과정」, 『의사학』 7-1 (1998), pp. 23-35.

여 인석·박 형우,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 『연세의사학』 3-1 (1999), pp. 1-44.

연세의료원 120년 기념 화보집 편찬위원회, 『사진으로 본 한국 근대의학 120년』 (서울: 청년의사, 2007).

오 종희·권 순정, 「1876~1945년 한국 근대보건의료시설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한 연구」, 『한국의료복지시설학회지』 9-2 (2003), pp. 25-36.

왕 현종·이 경록·박 형우, 「구리개 제중원의 규모와 활동」, 『의사학』 10-2 (2001), pp. 135-152.

이 동범·한 동수, 「서울 제중원(濟衆院)에 관한 복원 연구」, 『건축역사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016-1 (2016), pp. 227-232.

전 봉희·주 상훈·최 순섭, 『일제시기 건축도면 해제I-학교편』 (대전: 국가기록원, 2008).

정 정남, 「漢城府의 ‘統戶番圖’ 제작과정을 통해 본 大韓帝國期 觀光坊 대형필지의 변화양상」, 『건축역사연구』 20-1 (2011), pp. 7-16.

조 우현·박 종연·박 춘선, 「우리나라 근대 병원의 등장」, 『의사학』 11-1 (2002), pp. 20-48.

주 남철, 『한국의 민가』 (서울: 아르케, 1999).

한 동관·류 창욱·고 상균·정 재국·문 종윤·박 윤형, 「한국 근대 의료 건축물에 관한 연구」, 『의사학』 20-2 (2011), pp. 395-423.

황 상익, 『근대 의료의 풍경』 (서울: 푸른역사, 2013).

TOOLS
PDF Links  PDF Links
PubReader  PubReader
ePub Link  ePub Link
Full text via DOI  Full text via DOI
Download Citation  Download Citation
  Print
Share:      
METRICS
1
Web of Science
0
Crossref
0
Scopus
14,552
View
179
Download
Related article
Editorial Office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Department of Humanities and Social Medicine, College of Medicine, The Catholic University of Korea
222 Banpo-daero, Seocho-gu, Seoul, Korea (06591)
TEL: +82-2-3147-8306   FAX: +82-2-3147-8480   E-mail: medhistory@hanmail.net
About |  Browse Articles |  Current Issue |  For Authors and Reviewers |  KSHM HOME
Copyright ©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Developed in M2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