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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1(1); 2022 > Article
일제강점기 위생 마스크의 등장과 정착*

Abstract

This paper examines the social life of masks in colonial Korea with a focus on their use in hygienic practices. It argues that masks first appeared in the disease control scene in late 1919 when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belatedly introduced preventative measures against the Spanish Influenza pandemic. Since then, the central and regional hygiene authorities had begun to encourage colonial Koreans to wear masks whenever respiratory disease epidemics transpired. Simultaneously, Korean doctors and news reporters framed mask-wearing as something needed for family hygiene, particularly for trans-seasonal child health care, and advised colonial Korean women to manage and wear masks. This paper also reveals that the primary type of masks used in colonial society was black-colored Japanese respirators. Its design was the main point of contention in the debates on the effectiveness of masks against disease infection. Finally, it also highlights that the wide support of using masks by medical doctors and authorities was not based on scientific evidence but on empirical rules they developed through the pandemic and epidemics. The mask-usage practice would be challenged only when South Korean doctors reframed it as a “Japanese custom not grounded on science” at the height of postcolonial nationalism and the raised concern about the artifact’s usefulness during the Hong Kong Influenza pandemic of 1968.

1. 서론

본 논문은 식민지 조선에서 마스크가 일상의 위생 도구로 정착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마스크 착용이 보편화되면서 의학사 및 관련 분야 연구자들은 전염병 방역 마스크의 역사적 기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연구들이 코로나19 범유행 때문에 시작되었음을 고려한다면 과거의 유행병이나 범유행이 일어난 시기에 연구 초점들이 놓여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례로 미국사 연구자들은 주로 1918~19년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에서, 마스크 착용이 구미보다 아시아에서 더 보편화된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 관심을 갖는 의학사 연구자들은 1910~11년 만주 폐페스트 유행에서 방역용 마스크의 기원을 찾는다.1) 이 연구들은 당시 청국의 방역 담당 우롄더(伍連德)가 외국인 의사들의 회의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행하던 페스트를 폐페스트로 정의하고 거즈 마스크를 발명, 보급하여 유행을 억누른 데 성공한 것이 방역용 마스크가 의학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계기라고 주장한다(Lei, 2014; Nathan, 1967; Rogaski, 2021).2) 이 서사에 따르자면 몇 년 후 일어난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은 방역 마스크가 중국 대륙을 넘어 전 세계에 퍼지게 된 핵심적인 사건이었다(Lynteris, 2018).3)
최근 일본과 중국의 소장 의학사학자들은 이런 팬데믹-중심적 역사서술을 문제 삼아왔다.4) 스미다 도모히사(住田朋久)에 따르면 독일 위생학계에서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마스크를 페스트 방역에 도입할 필요성을 논했고, 당시 독일 의학에 강한 영향을 받던 메이지 일본에서는 1899~1900년경 폐페스트로 추정되는 오사카 페스트 방역 활동에 마스크를 도입했다. 이 때 방역을 주도한 이시가미 도루(石神亨)와 그의 스승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郎)는 페스트 방역의 일환으로 마스크 착용을 권고하는 지침을 제시했고, 이것이 이후 1905년 호주 퀸즐랜드에서의 페스트 방역에도 채택되었다(住田朋久, 2021). 장멍(张蒙)은 이 같은 맥락을 고려했을 때 1910~11년 만주 폐페스트 유행 당시 마스크를 착용하자는 우롄더의 제안이 일부 역사가들이 서술한 것만큼 독창적이지 않았으며, 많은 반대자들을 양산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Zhang, 2021). 두 소장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호흡기”(呼吸器, respirator)라는 이름으로 적어도 1870년대 말부터 의학적 목적에서 마스크를 사용하는 일이 청나라와 메이지 일본에서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일본에서 마스크는 “위생적 근대”의 상징으로 방역과 무관하게 도쿄의 도시민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다(Rogaski, 2004; Lynteris, Sumida, and Zhang, 2021). 위생 도구로서의 마스크의 유행은 오사카 페스트가 일어났을 때 도시민들이 방역 당국의 지침이 없을 때에도 “폐페스트 방역용” 마스크를 소비한 까닭을 설명해준다(住田朋久, 2021). 이 연구들은 마스크 사용의 역사는 범유행이나 유행병의 특정한 순간보다 앞서 마스크가 더 넓은 위생적 실천에 자리 잡게 되는 과정부터 살펴보아야 함을 시사한다.
본 논문은 위의 연구들이 드러낸 동아시아의 마스크 착용 실천의 역사를 고려하면서 한국의 사례를 검토한다. 식민지 조선의 마스크에 관한 연구는 주로 1918~19년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 당시에 마스크 착용이 조선총독부의 방역 지침에 포함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Hayami, 2015; 김택중, 2017; 백선례, 2019). 최근 의학사 바깥에서 일제강점기 광고를 분석한 연구들 또한 마스크 착용의 역사를 부분적으로나마 살피고 있다. 이들 역시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이 막바지에 이르고 총독부가 마스크 착용 지침을 내리기 시작하는 1919년 12월부터 언론 지면에 마스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옥성득, 2020; 최규진, 2021). 다만 선행 연구들은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 이전의 전염병 관련 의학 문헌들과 방역 활동들에서 마스크가 실제로 등장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않았다. 또 범유행 이후 마스크 착용이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확산되었다면 그 기제와 배경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마스크가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지 않았다.
본 연구는 대한제국기(1897~1910)부터 일제강점기(1910~1945)에 이르는 동안의 의학 교과서, 방역 관련 문헌들, 외국어 사전들, 언론 보도 등 다양한 자료를 참조하여 사물의 사회적 삶(the social life of things)이라는 관점에서 식민지 조선에서 마스크가 도입 및 사용된 양상에 관한 전체적인 조망을 제공한다. 저자는 조선에서 마스크가 위생용 도구로 등장한 것이 주변국에 비해 상당히 늦은 1919년 말~1920년 무렵이었으며, 이후 마스크 착용 실천이 확산 (및 문제화) 되는 데에는 지역 방역 당국의 마스크 장려 정책뿐만 아니라 소아 보건을 둘러싼 가정위생 담론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이처럼 위생 마스크가 식민지 조선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최근 관심이 커지고 있는 한국 의학사에서의 의학적 인공물의 역할을 조명하는 연구 흐름에 사소하게나마 기여할 것이다(백선례, 2020a; 2020b; 박정제·정준호, 2021).

2. 마스크 없이 입을 가리기

이웃한 지역들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면 마스크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조선의 위생 담론과 실천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메이지 일본과 청나라에서는 1870년대 말엽부터 마스크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언급되고 사용되었으며, 위생 운동과 전염병 방역 활동과 같은 다양한 위생 실천들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반면 조선에서는 일본 제국의 강제 병탄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경과한 1920년에 이르러서야 위생 실천에 포함되었다.
위생 마스크의 역사는 호흡기라는 도구의 개발과 함께 시작되었다. 세균설 대신 장기설(miasma)이 일반적이던 1830년대에 영국의 외과의사 제프리스(Julius Jeffreys)는 결핵을 비롯한 호흡기 질환 환자들이 추운 환경에서 온기와 습기를 담은 날숨이 나가는 것을 막고 호흡 장애를 완화하기 위한 도구로 입만, 혹은 입과 코 모두를 가리는 “레스퍼레이터(respirator)”를 개발했다. 1836년에 특허를 받은 이후 제프리스의 레스퍼레이터는 영국의 약종상들 사이에서 외부의 차가운 공기를 차단하는 호흡기 질환 예방 도구로 홍보되며 널리 판매되었다(Zuck, 1990).
동아시아에서 레스퍼레이터에 관한 가장 앞선 기록은 독일인 선교사 롭샤일드(Wilhelm Lobscheid)가 편찬한 최초의 영중사전인 『영화자전英华字典』 (1869)에 “호흡지기(呼吸之器)”로 번역된 사례이다(Meng, 2021: 224). 메이지 일본에서는 롭샤일드의 사전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부음삽도영화자휘附音挿図英和字彙』를 통해 레스퍼레이터가 “호흡기(呼吸器)”로 소개되었다 (柴田昌吉, 子安峻, 1873: 971).5) 일본에서 이 물건은 “추운 공기(寒冒)”로부터 발생하는 호흡기 질환 예방 도구로 광고되었으며, 나아가 위생적 근대의 상징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松本市左衛門, 1879; 宮武外骨, 1926: 69에서 재인용). 세균설이 메이지 일본에서 널리 퍼지게 된 1880년대 후반에는 동아시아 의학에서 폐병의 병인으로 지적하는 폐충(肺蟲)이 박테리아(バクテリア)로 설명되며 이것의 흡입을 막는 용도로 이해되면서 도쿄와 오사카의 도회지의 지식인 계층과 폐병 환자들 사이에서 사용되기도 했다(Sumida, 2022). 같은 시기 청나라에서는 상하이 조계의 선교 병원에서 제한적으로나마 의학적 목적으로 이 호흡기가 소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다른 종류의 호흡기들이 청나라와 메이지 일본의 지식인 계층에게서 알려지고 사용되기도 했다. 그 중 하나가 스코틀랜드 출신 화학자 스텐하우스(John Stenhouse)가 고안하고 특허를 출원한, 숯가루를 필터로 사용한 스텐하우스 호흡기였다. 영국 성바르톨로뮤병원은 간호사들과 환부 치료사들이 악성 공기, 혹은 장기(miasma)를 막는 용도로 이 스텐하우스 호흡기를 착용했다(Tilden, 1919). 1881년 청나라에 고용된 영국인 선교사 존 프라이어(John Fryer)가 교과서로 사용할 목적으로 한역한 『화학위생론化學衛生論』은 스텐하우스 호흡기를 서구 과학이 이룬 성취의 한 가지 사례로 다루었다(Rogaski, 2019: 61-64). 이외에도 프라이어가 서수(徐寿)와 함께 번역한 화학교과서 『화학감원化学鑑原』(1871)과 프라이어와 함께 중국 근대 화학 용어 정립에 기여한 미국인 선교사 커(John Glasgow Kerr)의 『화학초계化學初階』(1870)에서도 스텐하우스 호흡기가 장기(프라이어의 용어로는 취기臭氣) 개념을 설명할 도구로 중요하게 소개되었다(현재환, 2022: 58-59).
일본에서는 1901년부터 호흡기에 관한 특허출원이 이루어졌다. 1910년경이 되면 이미 여러 종류의 “일본식” 호흡기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1901년에 출품된 제품 중 하나는 “안전호흡기(安全呼吸器)”라는 물건으로, 당시의 광고에서는 사노 한베이(佐野半兵衛)가 특허를 출원하고 의학 박사 나카하마 도이치로(中濱東一郎)가 보증하는 제품으로 소개되었다. 이 제품은 “추위(寒冷)”와 “호흡기병” 병독뿐만 아니라 “직공, 석공, 탄광, 방적”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비산”하는 “병독”들의 흡입을 막는 효능을 가진 것으로 홍보되었다[그림 1, 좌].6) 같은 제품이 1934년에 출간된 『동경의과기계동업조합목록東京医科器械同業組合目録』에 나타난다. <그림 1>의 우측 제품들 가운데 C270은 “나카하마식 안전호흡기”라는 이름으로 검은색과 흰색 제품이 판매되었으며, 검은색 제품이 0.7엔, 흰색 제품이 0.35엔으로 검은색이 두 배 가량 더 비쌌다. 이 “안전호흡기”가 군인이나 광부처럼 전문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물건으로 여겨졌다면, C273은 당시 민간용으로도 널리 쓰이던 호흡기의 전형이었다. 이 제품은 무명(綿布), 새틴(繻子), 벨벳(天驚絨)으로 만들어졌으며, 가격은 무명제가 가장 저렴한 0.35엔, 새틴제가 0.6엔, 벨벳제가 1엔이었다. 원단의 종류와 관계없이 천의 색깔로 검은색 내지 여타 어두운 계열의 색들이 활용되었다. 또 제품의 안쪽에 입이 닿는 부분에는 필터를 넣는 부분이 달려 있어 무언가를 넣거나 교체할 수 있었다[그림 1].7) 이 C273은 줄곧 “호흡기” 라고 불리다가 이 글의 3절에서 보여줄 것처럼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 이후 “마스크(マスク)”라는 새로운 명칭을 갖게 될 것이었다.
한편 구한말 조선의 지식인들이 호흡기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었을 문헌 가운데 하나가 프라이어의 『화학위생론』이다. 왜냐하면 1882년에 조선 정부가 이 서적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어로는 처음으로 위생에 관한 내용을 다룬 지석영의 『신학신설』(1891)은 책의 구조나 내용이 상당 부분 프라이어의 『화학위생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김연희, 2017). 이와 함께 “깨끗한 공기”와 “호흡의 위생”은 구한말 위생 담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일례로 1900년 10월 하층민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순한글 『제국신문帝國新聞』에 두 차례에 걸쳐서 1면 1단에 게재된 “호흡론”이라는 논설은 “졍결”하고 “됴흔 공긔”와 “혼탁한”, “악긔”를 나누고 후자에 해당하는 공기로 날숨, “방문을 닫고” “난로”를 피워 만들어진 공기, “상한 대서” 나오는 “고약한 긔운”, 그리고 방을 쓸 때 나오는 “먼지” 등을 지적했다. 이와 함께 이런 혼탁한 공기를 피하는 것이 몸에서 가장 중요한 호흡기 기관인 “폐경”을 잘 보호하는 것이고, 그 결과 “위생이 잘되여” 장수할 수 있다는 위생론을 펼쳤다.8) 이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황성신문皇城新聞』, 『만세보萬歲報』 등 다른 구한말 신문들과 『태극학보太極學報』와 『소년한반도少年韓半嶋)』와 같은 잡지들에서도 위생론의 핵심으로 혼탁한 공기를 호흡하지 않기를 권했다(이규영, 1907; 김경식, 1907). 불결한 공기들에 있는 “먼지(塵埃)”나 “작은 곤충(小蟲)”들을 “흡입하여 인후 및 폐장에 병(咽喉及肺臟病)”이 생길 수 있었다(김경식, 1907: 40).
이러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구한말 호흡기 위생론에서 스텐하우스 호흡기 같은 마스크는 등장하지 않았다. 공중위생의 차원에서는 오물들과 주거 공간을 분리시키는 도시 개편, 즉 치도론이 중심에 놓였으며, 개인위생의 차원에서는 실내 환기와 구강 호흡 대신에 먼지 등을 막는 “천연의 호흡 구멍(天然之呼吸空)”인 코로 호흡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권고로 한정되었다.9) 이는 교과서 지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중원의학교 1회 졸업생 홍석후가 의학도 교육을 목적으로 위생학자 쓰보이 지로(坪井次郞)의 교과서(1897)를 번역한 최초의 조선어 생리위생 교과서 『신편생리교과서』(1906)에서도 호흡기의 위생에 관한 논의 가운데 호흡기라는 물건은 언급되지 않았다.10)
구한말 학술장 바깥의 전염병 방역 활동에서도 호흡기를 사용한 흔적은 발견하기 어렵다. 일본에서는 1899~1900년에 오사카 및 고베 지역에서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이것이 “페스트 폐렴(ペスト肺炎)”일 가능성을 의심하면서 전통적인 방역 대책인 쥐잡기 및 환자 격리와 함께 감염자 및 사망자들을 다루는 의료진들이 모두 소독 처리한 호흡기를 포함해 온 몸을 가리는 장비를 착용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세균 검사 촉탁을 맡았던 이시가미 도루는 이후에 출판한 『페스트ペスト』(1901)에서 페스트 폐렴으로 추정되는 경우 환자를 간병하는 간호사들 역시 마스크를 포함한 보호구를 착용하기를 권고했다(住田朋久, 2021). 대한제국에서도 일본에서의 페스트 발발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일본 정부가 어떻게 방역 활동을 수행하는지를 자세하게 소개했다.11) 특히 1900년 당시 의학교 교장 지석영과 교사 후루시로(古城梅溪)는 페스트 예방 관련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12) 당시의 신문 기사들은 대한제국 위생 당국이 오사카 및 고베에서 이루어진 방역 활동의 전모를 파악하지는 못했음에도 그 일반론은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같은 시기 『제국신문』에 실린 “흑사병 예방법”에는 선페스트의 주요 감염 경로인 쥐 구제책과 감염자 관리와 관련된 물건 소독 방법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특히 페스트 환자 가정의 간호인과 청소부의 경우 전염 여부 확인을 위해 피부 상태를 늘 확인하고 장갑과 버선 등을 착용하기를 권했다.13) 다만 이 때에도 호흡기는 방호구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일본 내지의 의사들과 달리 오사카 페스트를 선페스트로만 인식해서 호흡기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시기는 조금 이후이지만 1908년 『태극학보』에 일본 치과전문학교를 갓 졸업한 김영재가 가래에 관한 위생 논고에서 이런 침과 “가래(唾痰)”에 “미균(黴菌)”이 있으며, 페스트도 감염자의 가래나 침으로 전염될 수 있는 종류가 있음을 소개했다. 이는 페스트 폐렴의 존재가 전염병 방역과 비교적 거리가 있는 조선인 의료인에게도 알려져 있음을 보여준다.14) 하지만 김영재 역시 호흡기를 언급하지는 않았으며, 그는 대신 가래를 담는 통인 “타구(唾具)”에 침을 뱉거나 집 주위에 토사물을 게워내고 방치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김영재, 1908). 페스트의 비말 감염의 가능성이나 우롄더의 마스크 방역 활동이 분명하게 알려진 1912년에 중앙위생협회조선지부의 『최신통속위생대감最新通俗衛生大鑑』에서도 폐페스트를 흑사병의 중요한 한 종류로 언급하지만 이에 대한 예방법은 마땅치 않다고 소개할 뿐이었다(中央衛生協會朝鮮本部, 1912).15)
가래를 와호(嘩壺)와 같은 타구에 뱉는 것은 비말 감염 질환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폐결핵의 주된 예방법이었다. 1912년 일본 내지에서 일본 적십자가 결핵예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보에 발맞추어 조선 적십자 본부는 1913년 기타사토의 『결핵예방강술서結核豫防講述書』를 번역해 조선의 여러 병원에 배부했다. 『강술서』의 요지는 폐결핵 환자와의 “4척 이상”의 거리두기와 환자의 가래를 “와호”에 뱉고 소독한 후 폐기하여 비말 감염을 최대한 피하자는 것이었다.16) 대만의 의학사학자 레이샹린(雷祥麟)은 이처럼 폐결핵을 예방하기 위해 1910년대에 구미 및 동아시아 각 국에서 침 뱉기 금지 운동을 벌인 것이 마스크를 외부로부터 오는 감염원을 차단하는 목적뿐만 아니라 본인의 타액으로 타인에게 전염병을 옮길 가능성을 막는다는 도덕적 감수성을 발달시켜 1918~19년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 당시에 일반인들의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 일정 정도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했다(雷祥麟, 2021). 아마 레이샹린은 수술용 마스크의 등장이 독일의 세균학자 플뤼게(Carl Flügge)의 결핵균 비말 감염 논의(1897)에서부터 비롯되었고, 이후 결핵 환자를 다루는 의료진을 위한 마스크가 고안된 것들 때문에 대중적인 결핵퇴치운동을 통해 마스크 착용이 수술실을 넘어 일상으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본 것 같다.17)
다만 식민지 조선의 경우 폐결핵 예방 운동이 마스크 착용 실천에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1918년 총독부가 제정한 「폐결핵예방에 관한 건肺結核豫防 に関する件」에는 공공장소에 와호를 설치하고 환자의 가래를 이런 와호에 뱉는 것을 핵심으로 두었으며, 환자의 기침과 관련한 어떠한 규제도 담고 있지 않았다(최은경, 2013). 이보다 한 해 앞서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위생과에서 의생(醫生) 시험 용도로 편찬한 『의방강요醫方綱要』는 법정 전염병 및 기타 조선에서 유행하는 전염성 질환들에 대한 발병 원인, 예후, 요법, 예방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여기서 폐결핵의 예방책으로 폐결핵 환자의 비말을 통한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천조각(布片)” 등으로 입을 가리게 하라는 권고가 포함되었다. 동일하게 비말 감염이 일어난다고 여겨지는 후두형 디프테리아, 두창, 성홍열에 대해서도 예방법으로 환자가 기침할 때마다 천조각으로 입을 막아 타액이 비산하지 못하게 하고, 사용한 천조각은 소독하여 재사용하라는 권고가 이루어졌다(警務總監部衛生課, 1917: 29-30, 36-37).
결국 폐결핵이 비말 감염 전염병들의 일반적인 방역 실천에 영향을 끼쳤다면, 그것은 환자들이 기침 시에 입을 가려야한다는 것과 환자들과 일반인들이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정도의 지침뿐이었을 것이다.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위생 당국자들에게는 비말 감염은 손수건이나 천조각으로 입을 가려 타액이 퍼지는 것을 막아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또 적어도 『의방강요』에 한정해서 보자면, 폐페스트는 조선에서 발병한 적이 없는 전염병으로 관련 예방법은 그다지 논의되지 않았다. 인플루엔자 역시 예방책을 딱히 제시할만 한 이유가 없는, 많은 사람들이 걸리기는 하지만 가벼운 계절성 질환에 불과한 것으로 증상 완화 약물들만이 약간 언급되었다(警務總監部衛生課, 1917).
1920년경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위생 담론과 실천 바깥에서도 호흡기와 마스크는 널리 활용되는 물건은 아니었던 것 같다. 1880년부터 1937년 사이에 출간된 11편의 조선어-외국어 이중어 사전들과 1922년과 1934년에 출간된 두 권의 신조어 사전들을 검토해 본 결과(황호덕·이상현, 2012; 한림과학원, 2010), 1880년 리델의 『한불자전韓佛字典』부터 1920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가운데 어떤 사전에서도 마스크나 호흡기와 관련된 어휘가 등재되지 않았다. 1890년 『영한자전英韓字典』과 1891년의 『한영자전韓英字典』에서 “Mask”가 수록되기는 했지만, 이 용어는 탈춤 혹은 탈놀음이라는 전통극에 사용되는 “탈”의 번역어로만 사용되었을 뿐이다. 한편 “가면(假面)”이 탈의 번역어로 최초로 사용된 것은 1920년에 조선총독부가 출간한 조일사전인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부터이며, “Mask”가 “가면(假面)”이나 “복면(覆面)” 등으로 번역된 것은 1924년 출간된 영한사전 『삼천자전三千字典』이 처음이었다. 일본과 중국의 사전에서 1860-70년대부터 소개되어 오던 “호흡기(respirator)”라는 물건이 조선어 사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1928년 김동성의 『선영자전鮮英字典』에서였다. 한편 1934년에 청년조선사에 의해 출간된 『신어사전新語事典』은 “마스크”를 신조어로 소개하며 “가면”이자 “얼골의 일부 또는 전부를 가리우는 것”으로 정의하며 처음으로 오늘날과 가까운 정의를 제시했다. 그리고 이종극의 『외래어사전外來語辭典』(1937)에서야 “감기예방”과 같은 의학적 용도의 마스크에 관한 정의가 등장했다.
“마스크”의 용례에 관한 검토는 적어도 1920년대 전까지는 “호흡기”나 “마스크”가 사전에 수록될 만큼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왜 조선에서는 중국과 일본과 달리 “호흡기”나 “마스크”가 사용되지 않았을까? 이에 관해서는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관련해 한 가지 잠정적인 가설로 조선에서는 페스트가 크게 유행하지 않은 점을 들 수 있겠다. 비록 조선인 지식인이나 재조 일본인 의사들도 폐페스트의 존재를 상당히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중일 양국에서 마스크가 방역 실천에 도입되는 데 결정적이었던 전염병인 폐페스트가 1920년대 전까지 조선에서는 운이 좋게도 유행하지 않았기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신규환, 2012).

3. 스페인 인플루엔자와 마스크 방역 지침

식민지 조선에서 마스크가 전염병 방역에서 중요한 인공물로 등장한 것은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이 끝나가는 시점인 1919년 말~1920년 초 무렵이었다. 김택중의 분석에 따르면 스페인 인플루엔자는 1918년 봄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2차 만연이 막 진행되던 9월부터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환자들이 보고되기 시작해 겨울에 정점에 도달한 후 1월부터 감소세를 보였다. 그 사이에 식민지 조선 전체에서 적어도 14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김택중, 2017: 179-184). 총독부는 “긔막히게 만흔 독감의 환쟈수”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대응을 전개하지 못했다. 인플루엔자가 감염자의 호흡기로부터 나온 분비물을 통해 전파되며 전염력이 높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 병인 자체는 여전히 논쟁 중이었고, 마땅한 치료법도 없었으며, 적용할 법령도 분명치 않아 당시 위생 활동을 주도하던 헌병경찰은 검병호구조사(檢病戶口調査)로 이환자와 사망자를 집계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활동도 하지 못했다.18)
1918년 겨울 전후로 내지와 다른 식민지들에서 관련 예방규칙이 제정 및 배포된 반면, 조선총독부는 예방을 위해 어떤 종류의 개인위생 실천을 요구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로 1919년 봄의 3차 만연의 피해를 그대로 넘겼다.19) 일본 제국 내무성 위생국은 1918년 여름까지는 미국과 동일하게 방역 담당자에게만 마스크(혹은 호흡기) 착용을 권고하다 1919년 1월부터는 사람이 혼잡한 장소에는 반드시 “호흡보호기呼吸保護器(레스퍼레이터レスピレーター 혹은 거즈 마스크又はガーゼマスク)”를 착용하고 기침 시에는 손수건 등으로 코와 입을 가리기를 요구했다(內務省衛生局, 1919).20) 한편 대만의 총독부는 내지의 조치에 앞서 1918년 11월 초에 환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내용을 담은 「유행성감모예방심득流行感冒預防心得」을 가결하고 배포했다.21) 식민지 대만의 신속한 대응과 대조적으로 조선총독부는 4차 만연이 진행되던 1919년 11월 말경에야 처음으로 도지사들에게 “예방 방법”을 “일반 민중”에게 널리 알리라며 “외출시 사람이 많은 곳”에 나가거나 감염자를 가까이에서 간호하는 간병인의 경우 “호흡보호기(呼吸保護器)”를 착용하라는 지침을 조선 민중에게 제시했다.22) 그리고 1919년 12월 27일이 되어서야 이 같은 개인위생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담은 최초의 「유행성감모예방심득」이 경기도지사에 의해 공포되었고, 이후 다른 도지사들도 이를 좇아 해당 「심득」을 따르라고 통보했다.23)
역사인구학 연구자 하야미 아키라(速水融)는 조선총독부의 “늦은” 행정적 대처를 당시 인플루엔자 확산을 늦출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는 데에서 찾는다(Hayami, 2015: 186). 다만 확산을 늦출 방안이 뚜렷하지 않았던 것은 대만총독부나 내지 당국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이런 뒤늦은 조치가 일어난 이유로 추정할만한 맥락 가운데 하나는 식민지 조선의 사회정치적 상황이다. 적어도 1919년 봄과 여름에 조선총독부는 3·1 운동으로 일어난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데 경찰 인력을 총동원해 경찰 중심의 위생 관리를 효과적으로 작동시킬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후술할 것처럼 1919년 1~3월에 조선총독부 기관지들에서는 경무총감부위생과의 예방안이 몇 번 언급되다가 공포되지는 못하고 단절된 뒤에 늦가을인 11월부터 다시 예방 법령 제정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이 같은 예방안 논의의 공백은 3·1 운동으로 인해 경찰 중심 위생 관리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증거로도 보인다.
한 가지 덧붙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조선의 경우 내지와 대만 등에서 제출된 「심득」을 따를만한 물질적 조건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식민지 조선에서 마스크 혹은 호흡기는 1919년 전까지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물건이었다. 실제로 인플루엔자의 비말 감염 가능성을 경고했던 1918년 10월 22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는 “기침을 할 때에는 수건을 입에 대고 기침”을 하라고 권고할 뿐 마스크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24)
호흡기가 조선총독부의 언설에서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19년 1월이었다. 이 때 총독부 기관지 『조선휘보朝鮮彙報』에는 경무총감부위생과 기사 하라치카오(原親雄)와 촉탁 우시지마 유우키(牛島友記)가 쓴 인플루엔자의 역사와 병인에 관한 설명, 그리고 예방법에 관한 글이 실렸다. 여기서 하라와 우시지마는 (1) 집회 금지, (2) 일시 휴교, (3) 관공서와 회사들 같이 운영 중단이 불가능한 활동들은 의사의 완치 증명서를 받은 이후에만 출근 허용, (4) 완치 환자는 출근 시 다른 사람들과 3척 이상 거리를 두고 대화 실시, (5) 환자의 가정 구성원은 완치 후 10일 전까지는 타인의 집에 방문 금지, (6) 외출 시에는 “호흡보호기(呼吸保護器)”를 착용해 “냉기와 진애의 흡입 방위”, 그리고 (7) 객담을 포함한 분비물로 오염된 것들의 소독 처리를 인플루엔자 예방안으로 소개했다.25) 흥미로운 대목은 하라와 우시지마가 호흡보호기를 잠재적 보균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착용하는 것이 아니라 “냉기”와 “진애(먼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착용하라고 제시했다는 점이다.26) 이 예방안이 객담을 오염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당시 위생 당국이 비말 감염의 가능성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이를 호흡보호기(마스크)를 착용해 차단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 1919년 3월 경무총감부가 권고를 준비 중이라고 예고한 예방안은 하라와 우시지마의 예방안보다도 호흡보호기의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이 경무총감부 권고안은 1월 안에서 호흡보호기에 관한 논의를 삭제하고 대신 환자와 거리를 두고 환자의 “객담비말”을 “흡입”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강조했다.27) 이런 내용은 「심득」이 배포된 이후인 1920년 3월 하라 치카오가 『경무휘보警務彙報』에 실은 인플루엔자 예방안에서야 바뀌었다. 여기서 하라는 사람이 많아 불가피하게 접촉해야하는 곳으로 외출할 때 “호흡보호기呼吸保護器(약명: 마스크 혹은 레스퍼레이터 / 略名: マスク又はレスピラート)”를 착용해야 한다고 설명했으며, 이 물건을 통해 인체 호흡 기관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으려는 대상을 냉기와 먼지에서 비말로 분명하게 재정의했다.28)
이 예방안들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호흡기”의 명칭을 “마스크 혹은 레스퍼레이터”라고 가리키면서 두 개의 다른 종류의 물건을 묶어서 “호흡보호기”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일본 내지의 위생국에서도 동일하게 보이는 양상인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스크의 종류와 지시 대상의 역사적 변천을 파악해야할 필요가 있다. 1910-11년 만주 폐페스트 사태와 이후 개최된 국제페스트회의의 결과 마스크가 페스트 방역의 도구로 채택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거즈 마스크에 “마스크(mask)”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국제페스트회의 이후 미국의 전염병동 의사들은 전염병 관리 현장 인력들에게 마스크를 착용시키고 그 효과를 평가하는 연구들을 수행했는데, 이들은 당시 국제페스트회의에서 결정된 거즈 마스크를 본으로 삼았다(현재환, 2022: 68-69). 이런 맥락에서 1918년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에 대응해 샌프란시스코 등 여러 미국 도시들의 보건 당국이 마스크 착용 의무화 조치를 실시했을 때 미국 적십자사가 장려한 마스크는 6겹의 거즈 마스크였다(현재환, 2022: 71-72). 다른 한편으로, 2절에서 설명한 것처럼 일본에서는 1870년대부터 제프리스 호흡기가 쓰인 이래 이를 변형한 일본식 호흡기를 사용해왔고, 이를 “호흡기” 혹은 “레스퍼레이터”(당시 표기로는 “레스피라-토”)로 불러왔다. 그 결과 일본 내지의 위생국이 미국의 마스크 규제 조치를 모방해 마스크 착용 권고령을 내릴 때 일본 위생 당국의 눈에는 유사하지만 조금 다른 두 종류의 호흡보호기가 존재했다. 하나는 1900년 페스트 방역 때부터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일본식 호흡기였고[그림 1], 다른 하나는 미국의 권고안을 통해 제시된 거즈 마스크였다(현재환, 2022: 73-74). 이런 이유로 내지의 「유행성감모예방심득」에 “마스크”와 “레스퍼레이터”가 병기되었고, 식민지 조선의 위생 기사는 이런 내지의 분류를 그대로 따라 적었던 것이다.
조선 민중에게는 거즈 마스크와 일본식 호흡기 모두 낯선 존재였다. 내지와 대만의 「심득」에서는 호흡보호기가 간단하게 “레스퍼레이터 혹은 거즈 마스크”라고 언급되었다. 1919년 1월에 조선총독부 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월보인 『조선휘보』에 실린 하라오와 우시지마의 예방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19년 12월에 경기도지사가 조선 인민을 대상으로 공포한 「심득」은 “호흡보호기”라는 물건이 “약국 등에서 판매하는 것이나 가제를 재봉하여 귀에 걸게 하는 자가 제작 스타일의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일본식 호흡기와 거즈 마스크의 종류와 형태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이는 식민지 위생 당국이 두 종류의 호흡보호기가 조선인 대다수에게 낯선 인공물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당시 『매일신보』의 보도들을 살펴보면 이 「심득」의 “호흡보호기”를 조선어로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를 두고 고심한 흔적들이 엿보인다. 12월 13일 총독부의원의 감염병 과장 다카기 이쓰마(高木逸麿)가 11월 지침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처음으로 “마스크”와 “호흡보호긔”를 써야한다는 논평을 남겼고, 다음날 경찰서에 배포된 「악감예방주의서」 내용에 관한 기사에서는 이 둘을 묶어 “호흡긔”라고 불렀다.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는지 23일 기사에서는 이 호흡보호기를 “입코덥개”라고 소개하고 거즈 마스크를 “입을덥는것”으로 첨언했다. 이듬해 1월에도 여전히 이 물건에 대한 이름은 확정되지 않아 경기도청의 「심득」을 소개하는 기사는 마스크를 “입차기”로 설명했다.29) 그리고 “약국(藥店)”에서 판매하는 물품이라고 적었지만 실제로 판매처가 거의 없어 경성부는 여러 여학교 학생들이 제작하고 이에 대해 개인 구매자들에게 실비 청구하기를 요청했다.30)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이 잦아든 이후 총독부 위생 당국은 일반인들에게 마스크를 착용을 권고하는 인플루엔자 방역 지침을 다양한 호흡기 전염병들의 대책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종로(本町)경찰서에서는 1921년 겨울부터 인플루엔자와 성홍열 예방을 위해 외출시에는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권고했다.31) 1925년 겨울에 다시 경성 내 소학교들에서 성홍열이 유행하자 경기도 위생과장은 감염자가 발생한 소학교는 휴학시키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담화를 진행했다.32) 1926년에는 성홍열뿐만 아니라 발진티푸스도 유행했는데, 이때도 마스크 착용이 “최선의 예방책”으로 널리 홍보되었다. 예를 들어 당시 경기도위생과장 스오 마사스에(周防正季)는 마스크 착용을 주요 방역책으로 제시하며 적극적으로 권장했다.33) 소학교의 경우에는 방역 활동이 지나치게 마스크 착용 홍보에 치우쳐져 약제나 예방주사 보급 등에 소홀하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34) 사실 마스크 착용은 방역 당국의 입장에서는 개인들에게 습관을 들이게만 하면 되는 돈이 들지 않는 방법으로, 결핵예방운동이 개인위생에만 초점을 맞추고 소극적으로 진행되었던 것과 동일선상에 놓여 있었다(최은경, 2013; 박윤재, 2008).
이처럼 지역 위생 당국은 인플루엔자, 성홍열, 디프테리아, 뇌척수막염, 두창을 비롯한 다양한 호흡기 전염병이 유행할 때나 겨울철에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권고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표 1>은 1920년부터 『외래어사전』에 마스크가 감기 예방 용도로 등재되는 1937년 이전까지 식민 정부가 호흡기 전염병 방역의 일환으로 마스크 착용을 권고한 내용을 다룬 기사들이다. 이에 기초해 보면 지역 위생과와 경찰서는 유행성 독감(25회)과 성홍열(12회)과 관련해 가장 많이 마스크 착용 경보를 발령했고, 다음으로 뇌수막염(7회), 기면성 뇌염(2회), 그리고 발진티푸스(2회) 유행시에도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선전했다. 이같이 지역 위생 당국이 마스크 착용을 격려하는 가운데 마스크는 점차 식민지 일상의 위생 도구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4. 가정위생의 도구화와 마스크를 올바르게 착용하기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겨울철 경성 시내에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는 일이 흔한 풍경이 되었다. “마스크 장사”는 겨울마다 “급작이 한미천을 잡어 길거리에는 마스크를 안이한 사람이 별노없”어 “여자나 남자나 말할 것 없이 마스크들”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그 수가 너무 많아 당시 조선인 언론 사설들은 이들을 “보기거북한 마스크당들[무리들]”이라고 비난할 정도였다.35) 물자가 부족하던 전시에도 마스크는 겨울철 필수품처럼 사용되었다. 1940년 12월 조선총독부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의 가격을 고정시키는 「가격등 통제령價格等統制令」을 “위생마스크”에 적용했다.36)
위생 당국의 전염병 방역을 위한 마스크 착용 권고만으로는 마스크가 이처럼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 절에서는 언론 보도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총독부뿐만 아니라 조선인 언론과 의사들이 어린이의 건강과 집안 내 환자를 돌보는 데 마스크 착용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마스크를 소위 “가정위생”의 도구로 자리 잡게 만들었고, 그 결과 마스크 착용이 의사들 사이에서 “오히려 건강에 해를 끼칠 정도로” 아무나, 독감 유행과 상관없이 널리 착용한다는 우려가 등장할 정도로 유행하게 되었음을 살핀다.37)
당시 총독부에서 발행하던 『매일신보每日申報』(1910~1945)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朝鮮日報』(1920~1940)와 『동아일보東亞日報』(1920~1940), 그리고 잠시 출간되다 폐간된 『중외일보中外日報』(1926~1931)는 조선인 부인들을 독자로 겨냥한 “가정(家庭)”, “부인(婦人)”, “가정부인(家庭婦人)”면에 환절기 아동의 건강관리나 가정 내 환자 돌봄과 관련해 마스크 착용에 관한 계몽 기사를 꾸준히 게재했다. 1921년부터 1940년 사이에 매해 1~3월과 11~12월마다 소위 “가정”면에 게시된 마스크 관련 기사가 200여 건에 달했으며, 소아과, 내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환절기마다, 혹은 학생들이 여럿 모이게 되는 상급학교 수험 기간 동안 소학교나 보통학교에 다니는 유소년들 사이에서의 성홍열 및 디프테리아와 같은 전염병 예방, 그리고 수유 시 영아의 감기 예방을 위한 조언 가운데 마스크 착용을 권했다.38)
주로 초겨울과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늦겨울 및 초봄에 집중적으로 의학 전문가들이 마스크 착용을 권고하는 기사들이 게재된 것은 왜일까?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 당시의 경험들이 소위 “졸한(猝寒)” 이론이라고 부를만한 가설을 식민지 사회의 조선인 의사들과 일반 대중 사이에서 널리 공유하게 만든 것 같다. 1918년 9~11월 사이에는 일교차가 극단적으로 크고 갑작스럽게 추워졌는데, 이런 극심한 기후 변동 때문에 범유행이 일어났다는 시각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경성에서 내과의원을 운영하던 김홍관은 1931년 라디오 위생강좌에서 “여러분이 잘 기억하시는 바와 가치 십이년전”에 “일기가 혹한되지 아니하얏다 별안간 돌변하는 한랭에 유행성감모가 대유행”했다고 설명하며 “기후변동”과 “감모”의 “유행”을 연결시켰다.39) 실제로 1918년 11월 8일에 원산은 영하 5도, 다음 날 경성은 영하 2.7도로 급격히 기온이 떨어졌으며, 며칠 뒤인 12일에 진주에도 졸한이 찾아왔다.40) 이런 졸한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가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와 꽃샘추위가 일어날 수 있는 봄철이었다. 경성제대 병원의 명대혁은 졸한이 일어났을 때 난방이 되는 따뜻한 곳에서 추운 바깥으로 나가면 “급격히 한기를 호흡”하게 되는 “온도적 자극”에 의해 “비점막에 염증”이 생기는 동시에 “감모균에 대한 저항력이 감소되어” 감기에 걸리게 되며, 이것이 결국 각종 호흡기 전염병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했다.41) 경성제대 내과의 김동익과 같은 의사들이 보기에 이런 졸한이나 혹한기에 마스크는 단순히 세균을 차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온도를 인공적으로 조절”하여 “급격히 변하는 공긔”를 들이마시는 일을 막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는 도구였다.42)
이 “가정”면에 소아를 위한 마스크 착용을 독려한 조선인 의사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이선근이었다. 이선근은 12편의 소아보건에 관한 사설들에서 소아와 소아가 있는 가정의 성인들이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선근은 1924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의원 소아과에서 수련을 받다 1928년에 해당 의원이 경성제대 의학부 소속으로 재편되면서 의학부 소아과학교실 조수로 활동하던, 조선에서 교육받은 최초의 소아과 전문의였다(박지영, 2019: 54-56). 그는 1930년경부터 소아 건강에 대한 의학 지식의 대중화를 위해 강연회와 기고에 힘쓰던 인물로, 경성제대에서 조수로 봉직하던 1930년부터 1934년 경성부립의원 소아과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수차례 『동아일보』의 “가정”란에 디프테리아, 성홍열, 뇌수막염, 감기와 같이 어린이들이 걸리기 쉬운 호흡기 전염병과 겨울철 소아의 건강관리에 관한 칼럼을 기고했다. 이선근이 강조한 소아 위생의 핵심은 아동들을 환자와 접촉시키지 않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데려가지 않으며, 과산화수소 등으로 양치를 자주하는 것과 함께 외출할 때 꼭 마스크를 씌우라는 조언이었다.43) 이 가운데 환절기마다 아동들의 건강을 위해 아동들, 본인, 그리고 가정의 다른 성인들에게 마스크를 착용시키는 것이 근대적인 위생 양식을 준수하는 조선 부인들의 도덕적 의무가 되었다. 겨울철에 아동들에게 마스크를 씌우지 않은 채 본인만 쓰고 다니는 성인들은 소아 위생의 책임을 방기한 것으로 비난 받았다.44)
한편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되면서 마스크가 오히려 위생적으로 해가 된다는 주장이나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마스크를 쓰는 것”이 “좋은가 그른가”를 둘러싼 논의 가운데 비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45) 첫째, 일반적인 형태의 마스크의 경우 안에 탈지면이나 솜 대신 거즈를 여러 겹 넣되 소독한 거즈로 매일 교체할 것, 둘째, 가능한 검은색 마스크 대신 하얀 거즈 마스크를 착용할 것, 셋째, 건강한 사람의 경우 필요한 경우에만 쓰고 상시 착용하는 일을 지양할 것이다.46) 사실 앞의 두 비판은 마스크 착용 자체보다는 올바른 종류의 마스크가 무엇이고 어떻게 착용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지를 둘러싼 논의였다. 오직 마지막 비판만이 마스크 착용 자체를 문제 삼았다.
그런데 앞의 두 비판은 당시 상용되던 마스크가 오늘날 으레 생각하는 흰색의 면 마스크가 아니었음을 깨달아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1930~40년대 식민지 사회에서 사용되던 마스크들 가운데 오늘날의 일반적인 방한 마스크와 가장 유사한 제품은 흰색 거즈 마스크였는데, 이 종류의 마스크는 주로 군인들이 착용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호흡기라는 용어가 마스크로 대체되기는 했지만, 식민지 일상에서는 중화민국이나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던 거즈 마스크 대신에 앞서 언급한 일본식 호흡기들이 유행했다. 이런 일본식 호흡기 가운데에서도 까만색의 부리 모양이라 착용자가 흔히 “카라스텐구(烏天狗)” 같다고 놀림 받던 종류의 것이 특히 많이 사용되었다[그림 3].47) 당시 기침약으로 널리 판매되던 “용각산”의 광고에서는 중년 남성, 부인, 어린이가 검은색 부리형 마스크를 쓰고 있거나 어머니가 아이에게 검은 마스크를 씌워주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48) 일본 내지의 경우와 동일하게 식민지 조선에서 사용되던 부리형 마스크의 겉면은 보통 검은색의 새틴(貢緞)이나 벨벳(羽緞), 그리고 드물게 가죽 등을 재료로 삼아 만들어졌으며, 집에서 수제로 제작한 경우에는 털실로 만든 경우도 많았다. 당시 사람들은 제품 내부에 있는 필터 교체 부위에 솜이나 탈지면, 거즈 등을 넣어 방한성을 확보했다.49)
이 같은 고형(固形) 마스크는 착용자의 두형, 비형, 두개골 크기 등에 따라 마스크가 코와 입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또 당시 주로 쓰인 검은색 마스크는 때가 타도 쉽게 티가 나지 않아 자주 빨래 및 소독을 하지 않는 비위생적인 습관을 야기한다고 여겨졌다.50) 여기에 더해 1910~11년의 만주 폐페스트와 1918~19년의 스페인 인플루엔자 유행 전후 마스크의 비말 차단 효능에 대한 연구들은 주로 거즈 마스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마스크가 감염자의 비말을 차단할 수 있는 거리와 마스크 두께 간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들도 주로 거즈 매수로 평가되었다.51) 이 때문에 의학 전문가들과 언론은 다섯 내지 여섯 겹의 거즈 마스크를 얼굴에 맞게 만들어 착용하고 다니기를 권장했으며,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흑색 공단의 마스크 또한 적어도 입과 코가 닿는 부위에 소독한 거즈를 대고 자주 교체하기를 권했다.52) 이런 권고들 역시 모두 “부인” 혹은 “가정”면에 게재되었다.
이상의 의학적 조언들, 특히 마스크나 거즈를 매일 깨끗이 빨아야 한다는 권고가 주요 독자로 상정되던 조선인 부인들에게 비현실적이었음을 언급해둘만하다. 예를 들어 마스크 세탁 권고가 막 등장하던 1931년경에 급수량이 가장 넉넉했던 인천 수도는 인천 거주 조선인의 25%에게만 공급되고 있었다(이정, 2019: 55). 이러한 수도 사정을 고려하면 가족 구성원들의 마스크는 물론이거니와 거즈를 매일 세탁하는 일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가정은 별로 없 었을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착용이 불필요하다는 마지막 비판은 일견 인플루엔자 범유행 이후 미국에서 일반인의 마스크 착용 지침을 두고 전개된 논의와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1921년에 국제 보건을 이끈 국제공공위생사무소(Office international d’hygiène publique)는 인플루엔자 유행 관련 지침에 병원 및 일상에서의 마스크 착용을 특별 예방 조치(special preventive measures)의 일부로 포함시키기는 했으나 유행을 억제하는 효과는 크지 않다고 논평했다(Pottevin, 1921). 이런 입장은 미국의 공중보건 전문가들이 대중의 마스크 착용 의무화를 도입했던 지역에서 사망률을 의미 있게 낮추지 못했다는 발견에 기초한 결론이었다(Kellogg, 1919; Kellogg and MacMillan, 1920). 물론 마스크 착용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요인들이 문제인 것인지는 불명확했다. 예를 들어 마스크 의무화 지침을 내릴 때 미국 보건 당국자들이 말한 “의학용 거즈 마스크”는 구멍이 촘촘하고 몇 겹의 거즈로 쌓인 것을 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얇고 구멍이 숭숭 뚫린 거즈로 입을 가리고는 했다. 마스크의 적절한 착용 역시 문제가 되었다. 착용자들이 코까지 덮지 않는 경우는 가장 흔한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병동이나 각종 장소에서 마스크 착용이 요구될 때마다 거부하고 저항하는 일도 잦았다(Vaughan, 1921). 이 때문에 미국의 세균학자이자 공중보건학자인 조던(Edwin O. Jordan)은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에서 감염자 및 감염자와 접촉하는 간호인들에게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의 효과는 분명하게 확인되었지만 예방 조치로 일반 대중에게 마스크를 씌우는 것의 효과는 여전히 밝히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Jordan, 1926).
하지만 조선인 의사들이 이런 인플루엔자 방역에 관한 국제 지침에 영향을 받아 건강한 사람은 착용이 불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재조 일본인 의학 전문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의 마스크 방역에 관한 공중보건학적 논의에 대한 무관심은 조선총독부의 위생 정책이 당대 미국의 공중보건학의 성과를 거의 참고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별로 놀랍지 않다. 두 집단 모두 앞서 언급한 “졸한” 이론에 기대며 갑자기 추워지는 환절기나 인플루엔자가 유행하는 시기에는 건강한 일반인들도 전차를 탑승하거나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갈 때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권했다. 이들은 다만 이런 예외적인 상황이 아닌 경우에도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일반인의 건강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경성의학전문학교 내과학교실의 조교수 임명재는 호흡기에 문제가 있거나 허약한 경우가 아니면 마스크를 늘 끼고 다닐 경우 호흡기의 추위 및 세균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질 뿐만 아니라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기회도 앗아가 오히려 몸에 해롭다고 주장했다.53) 1935년 12월 5일에 재조일본인들이 읽는 『조선신문朝鮮新聞』에 기고한 사설에서 일본인 의사 구보카와 쓰네히로(窪川経廣)는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감기를 예방하는 데 소극적인 방법으로, 이를 맹신하지 말고 운동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등 적극적인 방법 또한 꾀해야 한다고 독자들에게 조언했다.54) 이처럼 마스크 착용을 감기에 대한 소극적 예방법으로 보고, 신체의 저항력 향상을 위한 활동들을 별도로 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의사들이 널리 공유하는 입장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마스크는 식민지 사회의 일상 풍경을 이루는 일부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식민 정부의 전염병 방역 권고에 따라, 다른 한편으로는 아동의 건강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조선인 의사들과 언론들의 “가정위생” 담론에 의해 마스크는 환절기에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다만 위생 당국과 의사들이 이처럼 마스크 착용을 개인의 위생 실천으로 자리 잡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이들이 마스크 착용을 장려하는 데에는 별다른 과학적인 기반이 없었다. “졸한” 이론 같은 경험칙과 조선 사회에서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던 거즈 마스크에 대한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전달한 실험 결과들이 1920-40년대에 이들이 (때로는 특정한 종류의) 마스크 착용을 의학적으로 권고하는 배경이었다. 지역 공동체 단위에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는 것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며 인플루엔자 예방 수칙에서 배제한 국제공공위생사무소의 지침이나 미국의 공중보건학 연구 결과들은 전혀 참조되지 않았다. 1933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동물심리학자 구로다 료(黑田亮)는 경성의 전차에서 마스크를 쓰고 탄 승객들을 관찰한 사설에서 마스크 착용의 위해에 대한 의학적 연구를 진료를 볼 환자가 없어 한가한 의사들이 연구해주기를 바란다고 냉소했는데, 실제로 효능에 관한 언설은 많았지만 이에 관한 실험적인 연구는 그다지 이루어진 것 같지 않다. 이는 아마도 구로다의 어조에서 드러나듯이 마스크 효능 연구가 학술적으로 크게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으로 보인다.55) 이런 점에서 식민지 조선에서 마스크 착용이 확산되고 정착되는 일은 “의학적” 권고의 산물이었지만, “과학적” 결론에 토대를 두고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5. 결론

이 글은 식민지 조선에서 마스크가 위생 담론과 실천에서 등장하고 자리 잡는 과정을 검토했다. 구한말부터 식민지 조선 초기까지 주변국들에서 유행하던 호흡기나 거즈 마스크는 방역 현장, 개인위생, 병원 수술실, 신문의 지면, 외국어 사전 등 그 어디에서도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마스크가 전염병 위생의 도구로 처음으로 제안된 것은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 종식이 가까워지던 1919년 겨울 무렵이었다. 이는 일본 제국 내에서도 대만이나 내지와 비교해볼 때 일 년 넘게 뒤늦은 출현이었다. 총독부와 지역 위생 당국은 인플루엔자 예방 지침의 일부로 공공장소에서의 마스크 착용을 포함시키고 마스크 제작 및 보급을 (소극적으로나마) 장려한 1920년 이래 호흡기 관련 전염병들이 유행할 때마다, 특히 겨울철마다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권고를 반복했다. 다른 한편으로 조선인 의사들은 소아보건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환절기와 겨울철에 아동과 자녀를 둔 가정의 어른들에게 마스크를 쓰라고 지속적으로 조언했다. 이처럼 마스크가 가정위생의 중요한 물품으로 강조되는 가운데 1930년대 경성의 겨울철 거리는 마스크로 얼굴을 덮고 나온 마스크당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마스크는 물자가 귀한 총력전 시기에도 생필품으로 등록될 정도로 조선인들에게 중요한 위생 도구가 되었다.
1920년 이후 식민지 조선인들이 대체로 착용하던 마스크는 흰색 면 마스크가 아니라 검은색 일본식 호흡기였다. 이는 “마스크”의 어휘 변천에 관한 조금 앞선 시기의 주변 국가들에 대한 사례 연구들과 관련해 음미해볼만한 관찰 결과이다. 장멍은 1910~11년 만주 페스트 유행 당시 하얼빈의 중국인 의사들이 페스트 방역에서 호흡기를 사용해오던 전통 가운데 저렴한 거즈를 사용해 얼굴을 덮는 “호흡낭(呼吸囊)”을 고안해 사용해왔고, 사실상 이것이 1912년 선양(영문명 묵던Mukden)에서 열린 국제페스트회의에서 가장 비용효과적인 것으로 채택된 거즈 마스크와 동일한 것이었지만, 국제페스트회의의 참가자들이 여기에 묵던 마스크(Mukden Mask)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호흡기”나 “호흡낭”과 같은 용어가 무효화되고 “구조(口罩)”라는 새로운 한역어가 고안되었음을 보여주었다 (Zhang, 2021: 27-32). 한편 스미다 도모히사는 인플루엔자 범유행 이후 그전까지 “호흡기” 혹은 “레스퍼레이터”로 불리던 일본식 호흡기가 거즈 마스크와 함께 마스크로 불리기 시작했음을 드러냈다(Sumida, 2022: 83).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 경우들과 달리 호흡기 사용의 전통이 없었다. 그 결과 “호흡기”와 “마스크”라는 용어가 인플루엔자 범유행 말기에 총독부의 방역 지침 반포 과정에서 “호흡보호기”라는 상위 범주의 일부로 동시에 도입되었으나, 전자의 용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사장되었다. 다른 한편 식민지 상황의 특성 때문에 내지에서 널리 사용되던 일본식 호흡기가 보편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현실에서는 “호흡기”를 사용하면서도 이를 가리키는 데에는 “마스크”라는 용어만을 사용하는 괴리가 발생했다. 거즈 마스크는 군인용이라고 여겨져서 그런 것인지, 때를 쉽게 타서 겨울철 내내 착용하기 불편해서인지는 몰라도 조선인들은 계속해서 검은색 호흡기를 즐겨 착용했던 것 같다. 1944년 겨울에도 검은색 일본식 호흡기 대신 거즈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권고가 제기된 점이 이런 호흡기 유행의 지속을 잘 보여준다.56) 이처럼 실제로 마스크란 이름으로 사용된 물건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고 단순히 수술용 마스크나 흰색 면 마스크로 가정한다면 식민지 조선의 마스크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이런 발견은 해방 이후 언제부터 일본식 호흡기가 흰색의 면 마스크로 완전히 대체되었는지를 묻게 한다. 이는 후속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전염병 방역과 가정위생의 맥락에서 광범하게 이루어지던 식민지기의 마스크 착용 실천은 해방 후에 어떻게 재편되었을까? 비록 마스크의 위상이 식민지기에 비해 다소 약화되기는 했지만, 해방 이후 “보건”이라고 새로이 명명된 여러 위생 활동들에서도 착용을 권장하는 지침은 유사하게 유지된 것 같다.57) 일제강점기에 마스크가 위생 실천의 일부로 포함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학교 보건 담론과 실천이 이를 잘 보여준다. 1948년 문교부의 김사달이 국민학교 보건교사들을 위해 저술한 『아동의학론兒童醫學論』은 양호 활동의 교육 가운데 “호흡기 계통의 보호” 관련 교육으로 “호흡기 계통의 기능”, “호흡조절”, “폐결핵 예방”, “호흡기 위생”과 함께 “마스크 착용법”을 포함시켰다(김사달, 1948: 93). 그러나 당시 중학교 학생들에게 인체 각 기관에 대한 생리학적, 해부학적 기능을 소개하고 이에 관한 개인위생 조치들을 설명하는 『중등교육 일반과학: 인류계』 교과서 8종 가운데 세브란스의학대학(1947년 이후)의 김명선과 최신해가 공저한 1종만이 “호흡기 위생”의 방편 가운데 하나로 “마스크 착용”을 언급했다(김명선ㆍ최신해, 1947).58) 개인위생에 대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또 다른 교과서인 『체육과 보건』(1947)에서도 호흡기 질환 및 전염병 전파 경로를 소개하며 예방법으로 감염자의 격리와 객담을 타구에 뱉게 하는 것, 일광, 공기, 영양 등의 고려와 운동의 실시 등만을 논할 뿐 마스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강필상, 1947: 35-36).
반면 일반 가정에서 즉각 참고해 사용할 수 있는 실용서에서는 마스크가 중요한 도구로 소개되었다. 출판인 김익달이 전후 의학계 인사들에게 글을 부탁해 편저한 『국민의학전서國民醫學全書』(1955)는 디프테리아, 뇌수막염, 페스트, 인플루엔자와 같은 비말 감염 전염병들의 예방 조치에 마스크 착용을 포함시켰다. 특히 인플루엔자가 유행할 때에는 건강한 사람도 외출시에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전쟁 직후 실용적인 보건 지식을 보급하려는 노력 속에서 마스크는 중요한 인공물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마스크는 호흡기병 가운데 “기침의 치료”와 일반적인 “감기 예방법”의 도구이자 개인들이 혹시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병균을 전파하지 않도록 “위생적 도의심”을 발휘할 수 있는 물건으로 이야기되었다(김익달, 1955: 95; 99; 121; 125; 254; 260).59) 각급 학교에서도 일제강점기와 유사한 대책을 반복했다. 1962년에 인플루엔자가 유행하자 전국국민학교사친회연합회는 문교부 당국에게 소금을 배급해 아이들을 양치시키고 감기약을 특배하는 것과 함께 “마스크를 장려할 것”과 같은 긴급조치를 내려달라고 건의했다.60)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가정위생 도구로서의 마스크의 위상이 본격적으로 도전받기 시작했다. 일부 보건학 전문가들과 의과대학 교수들은 사설을 통해 일반인들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습관은 “2차 대전기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며 과학적으로는 오히려 “해롭다”는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했다.61) 이처럼 식민지 조선의 마스크 착용 실천의 역사가 재발명되고 마스크 착용이 과학적으로 부적절한 것으로 재정의되는 과정은 당시 남한에서 진행되던 의학적, 과학적 탈식민화 기획들과 적어도 간접적으로나마 연결되어 있었겠지만, 이에 관한 연구는 추후 과제로 남겨둔다(Kim, 2016; Hyun, 2019).

Notes

1) 구미에서 방역용 마스크 착용 규범 확산에 스페인 인플루엔자의 역할을 강조한 의학사 연구로는 Crosby(2003)Tomes(2010)를 참고.

2) 레이의 이런 설명은 우롄더의 자서전의 회고에 기초한다. Lien-teh Wu, Plague Fighter: The Autobiography of a Modern Chinese Physician (Cambridge, UK: W. Heffer & Sons, 1959). 일본 세균학자들을 우롄더의 방해자로 놓는 서술의 기원은 만주 페스트에 관한 고전적 연구에서도 발견된다(Nathan, 1967).

3) 린테리스의 서술은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마스크의 역사에 관한 논문들이나 대중 저술들에서 별다른 검토 없이 재생산되고 있다(Høiby, 2021; 옥성득, 2020). 저자들을 제외하고는 일본의 마스크 착용의 역사에 관한 사실상 유일한 영문 논평인 호리(堀井光俊)의 글도 일본인의 마스크 착용의 배경을 만주 페스트 유행과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의 경험에서 찾는다(Horii, 2014; 堀井光俊, 2012).

4) 이에 관한 종설적 검토로는 현재환(2022)을 참고.

5) 해당 내용과 관련된 페이지 수를 확인하는 데 스미다 도모히사가 도움을 주었다.

6) 「安全呼吸器」, 『人民』, 1902.1.1. 이 기사에서는 특허출원 번호가 5724호가 아니라 20184호로 나오지만 해당 광고가 5724호 특허 명세서와 동일한 발명자이고 대동소이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같은 제품으로 다룬다. 실제로 20184호로는 해당 특허가 검색되지 않는다. 참고로 일본 특허 검색을 위해 일본특허청의 일본특허정보플랫폼 J-PlatPat(Japan Platform for Patent Information)을 이용했다.

7) 장멍과 스미다 도모히사가 이와 관련한 그림 자료들의 소장처들을 알려주었음을 밝혀둔다.

8) 「사람이 불가불 일신상」, 『帝國新聞』, 1900.10.18., 1면; 「호흡론 젼호련속」, 『帝國新聞』, 1900.10. 19., 1면.

9) 구한말 개화파 지식인들의 치도론에 관해서는 박윤재(2017)를 참고.

10) 해당 교과서에 대한 상세한 분석에 관해서는 박준형, 박형우(2012)를 참고.

11) 「日本黑死病」, 『皇城新聞』, 1899.12.5., 2면; 「流行病과 家鼠」, 『皇城新聞』, 1899.12.5., 2면; 「일본의 흑사병이 점점 번치난 모양이」, 『帝國新聞』, 1900.1.13., 3면; 「일본 대판에셔 흑사병이」, 『帝國新聞』, 1900.1.27., 3면.

12) 「預防演設」, 『皇城新聞』, 1900.2.26. 황성신문에 실린 강연회 요약문은 당시 일본 내지 의사들의 관점에서 볼 때 페스트 병인에 대해 틀린 정보와 대처법을 담고 있었다. 쥐, 벌레, 누에, 모기, 파리 및 오염물을 페스트의 병인으로 지적하고 의복을 청결히 입고 가옥의 통풍을 원활히 하는 것을 방역책으로 소개했다. 사실 이는 페스트만 특정한 논의라기보다는 페스트를 계기로 전염병 예방을 위한 일반론적인 위생론을 말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의학교가 경무청으로 보내 제국신문에 실린 “흑사병예방법”에는 예방책이 당대의 관점에서 비교적 정확하게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훈동 의학교에셔 흑사병 예방규촉 슈백권을」, 『帝國新聞』, 1900.3.24., 3면.

13) 「흑사병예방법 (젼호련속)」, 『帝國新聞』, 1900.3.28., 1면.

14) 일제 강점이 막 시작된 1910-11년 사이 만주 페스트 유행 때에도 총독부 의사들은 이것이 폐페스트일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우롄더 스스로가 과장되게 그린 것과 달리, 폐페스트의 존재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당시 만주에서 유행하던 흑사병의 주요 종류가 폐페스트인지, 그리고 이 폐페스트가 선페스트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아니면 별개의 것인지 등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폐페스트일 가능성을 조선총독부에 경고한 기타사토와 이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전통적인 선페스트 방역책(쥐잡기)을 고수한 총독부 간의 논쟁에 대한 소개로는 신규환(2014)김영수(2015)를 참고.

15) 이 책은 도쿄제대 병리학자 야마기와 가쓰사부로(山極勝三郞)등이 저술한 편저서를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16) 일제 강점기 결핵 예방 활동에 관한 상세한 분석으로는 최은경(2013)을 참고.

17) 수술용 마스크에 관한 간략한 개설로는 Strasser and Schlich(2020)을 참고. 식민지 조선의 병원, 특히 수술실과 진료실에서 수술용 마스크 사용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본 논문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주제이다. 다만 현재 쉽게 접근 가능한 사진 자료들을 살펴보면 1908년경 대한의원의 수술실이나 1910년대 세브란스병원의 진찰실, 그리고 총독부의원 진찰실에서는 마스크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1910년대의 유일한 사진 중 하나는 1916년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 수술 장면이고, 이후로는 192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와 조선총독부의원 졸업앨범에 실린 산부인과 수술 사진이 있다. 같은 졸업 앨범의 외과 수술 장면에서는 아무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지 않다. 다만 1930년대부터는 대부분의 병원들에서 외과 관련 임상강의, 병리학 실습, 외과 수술을 시행할 때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2009: 101; 119; 120; 131). 1920년대 외과 수술의 경우 촬영을 위해 의도적으로 마스크를 벗었을 수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참고로 1916년 산부인과 수술 사진은 다음의 출처에서 확인가능하다. 「[1916]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수술」,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 1916년도 졸업앨범』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소장, http://dept.snuh.org/dept/HHCC/bbs/photo2View.do?menuId=003014028&cid=11048&pageIndex=1, 접속일 2023.3.21).

18) 「鐘路管內만 二萬六千, 긔막히게 만흔 독감의 환쟈수」, 『每日申報』, 1918.10.31., 3면.

19) 세계적으로 가장 빨리 공공장소에서 일반인의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한 것은 1918년 10월에 의무화 명령을 도입한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였다. 일본 내지나 식민지에서는 이처럼 강제 착용 명령은 아니었고 권고안에 가까웠다(Crosby, 2003: 101-116).

20) 후쿠오카현과 같이 지역적 수준에서는 이미 일반인의 마스크 착용 권고안을 1918년 11월부터 내리고 있었다(Hayami, 2015: 46).

21) 「流行感冒預防心得」, 『臺灣日日新報』, 1918.11.4., 5면. 巫毓荃(2021)에서 재인용.

22) 「流行性感冒豫防ノ件」, 『朝鮮總督府官報』, 1919.11.25., 302-303쪽.

23) 「流行感冒預防心得」, 『朝鮮總督府官報』, 1919.12.27., 426쪽.

24) 「全朝鮮을 席捲한 毒感은 世界的 大流行인가, 지독한 감기는 팔도에 편만」, 『每日申報』, 1918.10.22., 3면.

25) 原親雄, 牛島友記, 「流行性感冒の歷史, 症候及豫防」, 『朝鮮彙報』 1919.1., 98쪽.

26) 당시 상당수의 일본인 의사가 인플루엔자“균”의 존재를 추정했다(Hayami, 2015). 

27) 朝鮮總督府, 「流行性感冒」, 『朝鮮彙報』, 1919.3., 84쪽.

28) 原親雄, 「流行性感冒の再襲豫防法に就て」, 『警務彙報』, 1920.3., 17쪽.

29) 모두 『每日申報』에 실린 기사들이다.

30) 「惡感豫防法發布?」, 『每日申報』, 1919.12.23., 3면.

31) 「傳染病은 日本人이 多數」, 『東亞日報』, 1921.12.18., 3면.

32) 「京城市內에 猩紅熱猖獗」, 『朝鮮日報』, 1925.12.24., 2면.

33) 「虱に注意しマスクを掛けよ發疹チブス, 最善の豫防法」, 『朝鮮新聞』, 1926.1.31., 2면; 「發疹チブスの流行期, マスクに賴りなさい, 周防衛生課長談」, 『朝鮮新聞』, 1926.2.23., 2면.

34) 「小學生を片端から侵しはやり風大暴れマスクの掛方に御注意うがひ藥も用意され度い」, 『朝鮮新聞』, 1952.2.10., 3면.

35) 「보기거북한 『마스크』당들」, 『朝鮮中央日報』, 1935.12.27., 3면. 조선일보 기자이자 시인이었던 김기림 역시 한 수필에서 “마스크당”이라는 어휘를 비난조로 사용했다. 「隨筆 어느午後의 『스케—트』哲學(二)」, 『朝鮮日報』, 1936.12.24., 5면.

36) 「價格等統制令第7條ノ規定ニ依リ衛生マスクノ販賣價格左ノ通指定ス: 朝鮮總督府告示第1346號”, 『朝鮮總督府官報』 1940.12.3., 6쪽. 당시 생필품 통제 법제의 설립에 관한 개설로는 허영란(2008) 참고.

37) 저자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마스크에 대해 언급한 신문 기사들을 조선인 혹은 조선어 언론인 『東亞日報』, 『朝鮮日報』, 『每日申報』, 『中外日報』, 『中央日報』, 『朝鮮中央日報』와 재조일본인을 독자로 삼은 『滿鮮日報』, 『朝鮮新聞』, 『京城日報』, 『朝鮮時報』, 『釜山日報』를 대상으로 조사했으며, 총 287건의 기사를 출판연도, 제목, 내용, 발언 주체를 중심으로 데이터베이스화했다. 이 가운데 총 38건이 면직공장 파업과 관련해 복지 일환으로 마스크를 지급하라는 등의 비의학적인 맥락의 기사였으며, 58건이 총독부 내지 지방 위생 당국이 전염병 유행과 관련해 마스크 착용을 권고하는 기사였고, 56건이 의사가 마스크 착용에 관해 권고하거나 착용의 문제점에 대해 토의하는 내용이었음을 확인했다. 아래에서 설명하는 내용들은 이에 관한 분석에 기초한 것임을 밝혀둔다.

38) 25명의 조선인 의사가 본인의 이름을 기재하고 마스크 착용에 관한 의견들을 제시했다. 정자영(여의), 김기영(한성의원), 김현경(삼광의원), 허영숙(여의), 지성주(의사), 이형호(천호당의원), 명대혁(경성제대병원), 이선근(경성제대소아과/경성부민병원), 심호섭(세브란스의전), 고영순(고내과의원), 유홍종(홍제의원), 이호형(의사), 정기섭(세브란스의전), 김교정(중앙의원), 김동익(경성제대내과), 구영숙(구소아과의원), 허신(산부인과의원), 임명재(경성의전), 유석창(사회영중앙진료원/민중의원), 김중여(중앙진료내과), 권영우(의사), 조헌영(한의사), 김성진(경성제대외과), 박병래(성모병원), 조동수(세브란스의전 소아과). 괄호 안은 기사 내에서 언급된 직업, 성별, 소속기관에 관한 정보로 모두 불완전하다.

39) 「라듸오」, 『朝鮮日報』, 1932.11.28., 3면. 1918~1919 범유행 당시 이런 “졸한”을 인플루엔자 유행의 이유로 찾은 식민지 조선인의 개인적인 기록으로는 윤치호(2015) 참고.

40) 「元山의 卒寒, 영하 5도가 됨」, 『每日申報』, 1918.11.08., 3면; 「京城의 卒寒, 零下 2.7도」, 『每日申報』, 1918.11.09., 3면; 「晋州에 卒寒, 비가 온 곳에」, 『每日申報』, 1918.11.12., 3면.

41) 「감각기능에 대한 주의(三)」, 『東亞日報』, 1929.10.10., 4면.

42) 「엄동에 주의할 감기예방법」, 『朝鮮日報』, 1930.1.12., 5면; 「졸한과 위생」, 『東亞日報』, 1933.1.13., 2면.

43) 1930년 1월 초에 『동아일보』에 시리즈로 게재한 “엄한긔의 소아위생”에서는 “외풍쏘는 것을 주의하라”며 감기 및 각종 호흡기 전염병 예방과 관련해, “엄한긔의 소아병”에서는 디프테리아, 성홍열, 유행성뇌척수막염과 관련해, 1930년 12월에는 유행성 인플루엔자 및 디프테리아와 관련하여 위와 같은 지침들을 소아위생의 핵심으로 제시했다. 이 같은 조언은 1934년 유행성 뇌척수막염에 대한 조언까지 반복해서 동일하게 이루어졌다. 「엄한긔의소아병 (七) 듸프테리와그종류」, 『東亞日報』 1930.1.13., 4면; 「엄한긔의소아병 (十) 猩紅熱양독」, 『東亞日報』, 1930.1.16., 5면; 「엄한긔의소아병 (十一) 流行性腦脊髓膜炎」, 『東亞日報』, 1930.1.18., 5면; 「가뎡부인: 엄한긔와소아위생(中) 외풍쏘는것을주의하라」, 『東亞日報』, 1930.1.4., 5면; 「어린아이 류행성 감긔는 이러케 예방하고간호할 것」, 『東亞日報』, 1930.12.21., 5면; 「제일 급히 서둘러야할 디푸테리(목병)가류행한다 (二)」, 『東亞日報』, 1930.12.24., 5면; 「集會塲所에 아이데리고 가지말라」, 『東亞日報』, 1934.4.5., 2면.

44) 「街頭의 스납 마스크한 風景」, 『每日申報』, 1934.2.6., 6면.

45) 「가정: 마스크 쓰는 것은 좋은가 그른가」, 『東亞日報』, 1933.12.14., 6면.

46) 1924년 2월부터 1944년 11월까지 총 50건의 기사가 마스크의 효과나 착용상의 주의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가장 이른 기사는 『朝鮮新聞』에 1924년 2월 22일자로 게재된 「マスクの使用方を誤るな」이고, 가장 마지막으로 지면에 게재된 기사는 『每日申報』에 1944년 11월 14일에 게재된 「마스크와 양추질」이다. 이와 관련된 기사를 가장 많이 게재한 조선어 신문은 『朝鮮日報』로, 1929년 2월 12일부터 1940년 2월 5일까지 「마스크의 주의」 (1930.12.10.), 「입마개는 로인이나 할 것」 (1932.1.31.)과 같은 제목으로 총 26건의 기사를 게재했다. 다음으로 『每日申報』가 11건, 『東亞日報』가 6건, 『朝鮮中央日報』 (1933~1937)도 『中央日報』(1933)과 『中外日報』(1926~1931)를 모두 포함하면 총 5건의 비판 기사를 게재했다.

47) 「京城の動脈を打診する(4), マスクは活躍する, その嚴然たる存在を觀る」, 『朝鮮新聞』, 1933.3.11., 3면.

48) 「龍角散」, 『東亞日報』, 1931.3.27., 8면; 「龍角散」, 『朝鮮日報』, 1931.4.16., 4면; 「龍角散」, 『東亞日報』, 1933.1.14., 4면; 「담기침 천식 百日咳」, 『東亞日報』, 1935.1.13., 2면.

49) 「마스크는 어떤 것이 조혼가?」, 『東亞日報』, 1933.2.3., 4면; 「マスクの科學, 常識の上からばかりでなく醫學的に效能を知りませう」, 『京城日報』, 1934.12.12., 3면.

50) 「마스크는 흰것이 제일」, 『朝鮮日報』, 1931.1.27., 5면; 「가정상식 마스크의 주의」, 『東亞日報』 1931.11.22., 4면.

51) 실제로 거즈 마스크의 겹수와 거리두기에 따른 비말 전파에 관한 실험적 증거를 유일하게 언급한 기사는 재조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경성일보京城日報』에 실린 기사가 유일한데, 다른 기사들을 참고해 볼 때 이 연구 결과는 일본적십자사 조선지부에서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유행 당시 미국적십자사가 거즈 마스크 착용을 장려한 것처럼 일본적십자사 조선지부 역시 6매 이상의 거즈를 겹친 거즈 마스크 착용을 권했다. 「マスクの効果, 六枚以上のがーぜを使用せねば效が無い」, 『京城日報』, 1927.12.11.; 「傳染病菌を防ぐマスクの効果」, 『釜山日報』, 1927.12.11., 6면.

52) 「가정: 마스크 쓰는것은 좋은가 그른가」, 『東亞日報』, 1933.12.14., 6면; 「마스크는 하되 까제를 자주 가를일」, 『朝鮮日報』 1937.12.9., 4면; 「불결한마스크는 도리어해독」, 『朝鮮日報』, 1939.2.22., 4면; 「겨울에 불가불 쓰는 마스크에 대한 상식」, 『東亞日報』, 1939.12.22., 4면.

53) 「늣추이가맨든 금년감기는 무섭다 예방과 치료에관한 (二) 몃가지주의」, 『朝鮮日報』, 1934.1.17., 5면.

54) 「マスクの注意」, 『朝鮮新聞』, 1935.12.5., 3면.

55) 「京城の動脈を打診する(4), マスクは活躍する, その嚴然たる存在を觀る」, 『朝鮮新聞』, 1933.3.11., 3면.

56) 「마스크와 양추질」, 『每日申報』, 1944.11.14., 2면.

57) 해방 이후 “위생학” 및 관련 활동들이 “보건학”으로 재편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동원(2020)을 참고.

58) 이외에도 마스크를 언급한 교과서로는 식물학자 이민재가 저술한 『생물: 하』(1957)를 들 수 있다. 여기서 이민재는 “감염병을 끊기 위해서는 청결법을 쓴다든가 개인적으로 마스크를 한다든가 전염을 매개하는 파리 모기 이동을 줄이고 쥐도 죽이면 된다”고 쓰고 있다(이민재, 1957: 101).

59) 마스크를 가장 많이 언급한 “호흡기병” 부분을 작성한 인물은 서울의사협회총무부장 김근배였다.

60) 「感氣藥特配등 建議」, 『東亞日報』, 1962.3.11., 3면.

61) 「마스크는 해롭다-世界를 휩쓰는 홍콩感氣」, 『東亞日報』, 1969.1.21., 6면.

그림 1.
일본에서 1901년에 특허출원을 받은 호흡기의 설계안(좌)과 1934년 보건위생기구 판매 목록 일람에 포함된 다양한 호흡기들(우).
Figure 1. A Respirator Patented in Meiji Japan (1901, Left) and “Japanese” Respirators Appeared in a Hygienic Instrument Sales Catalogue (1934,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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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1919년 12월 경기도지사 구도 에이이치(工藤英一)가 공포한 「유행성감모예방심득流行性感冒預防心得」.
Figure 2. The “Understanding the Prevention of the Contagious Cold” Announced by Provincial Governor of Keiki-dō Eiichi Kudō in December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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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조선군이 착용하던 흰색 거즈 마스크(좌)와 일반 아동들이 착용하던 검은색 벨벳 혹은 비단 마스크(우)
Figure 3. The Colonial Korean Soldiers Wearing White Gauze Masks (Left) and Korean Children Wearing Black Velvet Masks (『每日申報』, 1919.12.12.; 1934.11.26.; 193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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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The Korean Newspaper Articles Reporting Mask-Wearing Recommendations Made by Hygienic Authorities in 1920~1936
기사명 신문명 연월일
전염병은 일본인이 다수 동아일보 1921.12.18
발진지부스로 총독부 경비소독 조선일보 1924.2.27
아동들에게 매스크가 必要, 일반 학부형은 크게 주의하라 매일신보 1925.2.14
경성 시내에 성홍열 창궐 조선일보 1925.12.24
잠자다 죽는 병이 경성에도 드러왓다!! 조선일보 1926.1.10
인천 성홍열과 관측의 예방계획 조선일보 1926.12.25
류행감기 예방법 동아일보 1927.1.30
독감에 위협밧는 십여만 평원 주민 조선일보 1928.2.19
대구에 성홍열 동아일보 1928.5.18
성홍열에는 마스크 양독발반에는 입을 막는게 뎨일 특히 아동에 주의 매일신보 1928.11.29
강원도 지방 일대에 각종 전염병 대창궐 조선일보 1929.2.15
춘천엔 성홍열 발생 조선일보 1929.2.15
성홍열창궐 경성 시내에 동아일보 1929.2.18
함남북청에 뇌척수막염유행 조선일보 1929.3.23
북청에 기면병 발생 조선일보 1930.2.7
양양외이군에 악성독감 만연 조선일보 1931.1.17
평양에 성홍열 조선일보 1931.11.26
성홍열예방 김제서에서 동아일보 1932.2.15
신의주 성홍열 환자 삼십여명 동아일보 1932.3.7
뇌척수막염환자 신의주에도 발생 동아일보 1932.3.13
마진과 감기로 사망자가 속출 조선일보 1932.3.16
북진에 독감 조선일보 1932.3.26
척수염 유행 동아일보 1932.3.29
평양에 전염병 조선일보 1932.12.3
유행성 감기가 창궐 보교생결석자 다수 동아일보 1933.2.16
상당한 악성 한기를 주의 동아일보 1933.2.16
경산에 성홍열 조선일보 1933.6.8
부인: 환절기의 호흡기병 요새부터 주의할 감기는 어떠한 병? (중) 동아일보 1933.10.20
평양부내에 유행성독감 만연 조선일보 1933.12.3
가공할 유행독감 평양부내에 만연 보통학교생도에 병자 속출 매일신보 1933.12.6
평양부 일대에 유행독감 창궐 조선일보 1933.12.17
평남일대를 석권하는 유행성독감의 맹위 조선일보 1934.1.20
부의 의사, 간호부 각교로 순회치료 조선일보 1934.1.24
마스크 걸고 염수함수가 필요 유행성척수뇌막염에 대하야 매일신보 1934.3.21
뇌척수막염 평남각군에 만연 조선일보 1934.4.20
의주지방에도 뇌척수막염 유행 조선일보 1934.4.27
시내 뇌척수막염 조선일보 1934.6.5
감기와 성홍열 최근에 대유행 조선일보 1934.12.5
국경에도 독감 동아일보 1935.12.10
유감 더욱 맹렬 평양서 방역노력 조선일보 1935.12.10
신시 사십명 감긔걸려 동아일보 1935.12.14
평북에 감모창궐 결석아 천칠백명 동아일보 1935.12.17
남해지방에도 감모 대창궐 동아일보 1935.12.20
독감모 전도를 엄습 이병자 무려 이만 조선일보 1935.12.25
감기는 만병의 근본 예방과 치료법(이) 동아일보 19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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