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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6(1); 2017 > Article
아스클레피오스 신앙과 초기 기독교의 관계에서 본 병원의 기원*

Abstract

History of hospital is one of main fields of researches in medical history. Besides writing a history of an individual hospital, considerable efforts have been made to trace the origin of hospital. Those who quest for the origin of hospital are faced with an inevitable problem of defining hospital. As the different definition can lead to a different outcome, it is important to make a clear definition. In this article, the hospital was defined as an institution in which patients are housed and given medical treatments. According to the definition, the Great Basilius is regarded to have created the first hospital in 369 CE. The creation of hospital is considered to be closely related with Christian philantrophy. However, the question is raised against this explanation. As the religious philantrophy does not exclusively belong to the Christianity alone, more comprehensive and persuasive theory should be proposed to explain why the first hospital was created in the Christian World, not in the Buddhistic or other religious world. Furthermore, in spite of sharing the same Christian background, why the first hospital appeared in Byzantine Empire, not in Western Roman Empire, also should be explained. My argument is that Asclepius cult and the favorable attitude toward medicine in Greek world are responsible to the appearance of the first hospital in Byzantine Empire. The evangelic work of Jesus was heavily depended on healing activities. The healing activities of Jesus and his disciples were rivalled by Asclepius cult which had been widely spread and practiced in the Hellenistic world. The temples of Asclepius served as a model for hospital, for the temples were the institution exclusively reserved for the patients. The exclusive housing of patients alone in the temples of Asclepius is clearly contrasted with the other early forms of hospitals in which not only patients but also the poor, foreigners and pilgrims were housed altogether. Toward the healing god Asclepius, the Latin Church fathers and Greek Church fathers showed significant difference of attitudes. The Latin fathers were generally very critical on Asclepius while the Greek fathers were more favorable to the same healing god. This difference is also considered to be an important factor that can explain why the first hospital appeared in the Byzantine Empire.

1. 서론

병원은 현대 의료체계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제도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병원의 역사적 기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의학사에서도 중요한 주제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의료 행위의 중심 공간으로서 ‘근대적’ 의미의 병원이 등장한 것은 19세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의학적 치료만이 아니라 돌봄과 자선의 공간으로서 병원의 기원은 훨씬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라 일반적으로 서구에서 처음 병원이 출현한 시기는 4세기 비잔틴 시대로 보고 있다(Miller, 1997: 21-22). 초기 병원의 성립 과정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내용은 기독교와의 관련성이다. 병원은 기독교적 자선이 실천되는 공간으로서 등장했다는 것이다. 사실 중세기를 통해 병원은 기본적으로 교회가 운영하는 종교적 기관이었다. 또 실제로 강도를 만나 다친 사람을 치료해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상황은 병원의 기원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이야기로 이해되기도 한다(누가복음, 10장 25-37절).
그런데 병원의 이념적 기원을 종교적 사랑과 자선에서 찾는 것이 일견 타당해 보이면서도 역사적으로 실현된 병원을 보았을 때,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음이 드러난다. 앞서 최초 병원이 4세기 비잔틴 제국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비잔틴 제국은 동로마제국을 말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기독교는 313년 로마 제국에서 공인되어 제국의 종교가 되었다. 이후로 마제국의 분열과 함께 동서교회의 분열도 이루어져, 로마 교회의 수장은 서유럽을 관할하고,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은 정교회가 관할한다. 이렇게 해서 유럽 전역이 기독교화 된다.
서유럽에서 병원이 등장하는 것은 9세기 이후이다. 그리고 단순한 구휼기관이 아니라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는 것은 13세기에 와서이다(Miller, 1997: 5).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가? 단순히 병원이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는 자선기관으로 등장했다는 설명만으로는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왜 동일한 기독교적 이념을 바탕에 둠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제국에서 훨씬 일찍 병원이 등장하고, 로마와 서유럽에서는 그보다 늦게 등장했는가? 이 논문에서는 그 이유를 그리스 사회와 로마 사회가 의료에 대해 가졌던 태도의 차이에서 찾아보고자 시도했다.
나아가 다음과 같은 질문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보살펴야한다는 가르침은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고등종교들은 기본적으로 다 그러한 가르침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 세계에서만 그것이 일찍이 병원이라는 형태로 실현될 수 있었는가도 물어야 한다.
본 연구에서는 로마와는 달리 전문적 의료활동에 호의적이었던 그리스 사회의 특징과 더불어 헬레니즘 사회에 널리 퍼져있던 아스클레피오스 숭배의 관습이 기독교와 만나면서 병원이 태어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는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역, 다시 말해 후에 비잔틴 제국의 영토가 된 지역에서 널리 이루어졌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는 그 성립 과정에서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를 강하게 의식했다. 그것은 예수의 치유 사역이 의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앙과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의 초기 교부들이 아스클레피오스를 격렬하게 비판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는 점차 사라져갔으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을 통한 치유 활동은 기독교적 치유 활동의 일부로 통합되었고, 그것이 병원의 형태로 제도화되었다는 것을 이 논문에서 주장하고자 한다.

2. 병원의 기원과 개념

병원의 기원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병원의 기원을 기독교의 발전 과정 내부에서 찾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다소간 논란이 없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병원은 서기 369년 카이사레아의 대주교 바실레이오스가 만든 시설을 시작으로 본다. 그는 368년에 시작된 대기근으로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을 돕기 위한 여러 시설을 카이사레아 외곽에 만들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의학적인 도움을 나누어주었다. 이때 만든 병든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 병원의 기원이라는 것이다(Crislip, 2005: 103-109).
연구자에 따라서는 수도원의 ‘선구적’ 역할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것은 369년 이전에 각 수도원에서 독립적으로 해오던 구료의 자선 활동들이 기독교의 공인 이후 교회가 체계화되면서 4세기 후반에 교회의 체제 안에 편입되었고, 그것이 바실레이오스가 만든 병원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다(Crislip, 2005: 100-101). 사실 이미 4세기부터 다양한 명칭의 구료 기관들이 기독교의 틀 안에서 존재했음은 여러 연구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남성현, 2015). 그런데 병원의 기원을 따질 때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어려움은 무엇을 병원이라고 규정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가난하고 병든 자’라는 정형화된 표현에 나타나는 것처럼 가난한 자 가운데는 병든 자가 많고, 또 병들었기 때문에 가난해진 경우도 많다. 따라서 역사상 등장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든 구빈시설을 병원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초기 병원사 연구자의 한 사람인 크리슬립은 병원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준에 따라 정의했다. 첫 번째는 입원 환자와 이들을 위한 시설의 존재이다. 이에 따르면 외래진료만 이루어지는 진료소는 병원이 아니다. 두 번째는 전문적인 의학적 치료의 제공여부이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전문적인 의료인이 상주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세 번째는 자선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기관이어야 한다는 점이다(Crislip, 2005: 102). 크리슬립이 제시한 이 세 가지 기준은 각각 병원의 중요한 특징들을 잘 추출해 제시했다는 점에서 유용한 기준이지만 이에 대한 반론 또한 없지 않다.
특히 두 번째 기준인 전문적인 의학적 치료의 제공여부가 논란의 대상이다. 비판의 요지는 고대 세계에서는 ‘돌봄(care)’과 ‘치료(cure)’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오늘날 병원의 기준을 먼 과거에 투사하여 병원의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는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Ferngren, 2009: 127). 이러한 지적은 우리가 현존하는 어떤 대상의 역사적 기원을 찾아나갈 때 흔히 범할 수 있는 오류를 경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겨들을 가치가 있는 비판이다. 그것은 또한 깡귀엠이 과학사에서 선구자 찾기의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Canguilhem, 1989: 21-22). 예를 들어 전혀 다른 이론적·역사적 맥락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모크리토스가 말한 원자를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원자 개념의 선구, 혹은 기원으로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깡귀엠, 2010: 47). 그렇다면 병원의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도 이러한 선구자의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일까?
여기서 병원의 기원 문제는 과학적 개념의 기원 찾기와는 조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개념의 기원 찾기에서 문제가 되는 점은 개념적 차원에서 추출한 외관상의 유사성을 역사적인 연속성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반면 병원의 기원 찾기는 병원이라는 제도의 사회적 기능과 관련된 문제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병에 걸린 사회 구성원을 치료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특정한 제도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문제이다. 물론 크리슬립은 이 사회적 기능의 요소들을 병원이라는 개념을 이루는 요소로 활용하기는 했다. 그러나 사회적 기능의 연속성과 일반성은 추상적 개념의 연속성과 보편성보다 훨씬 더 굳건한 역사적 토대를 가지기에 깡귀엠이 경고한 ‘선구자 찾기’의 오류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의학적 치료의 제공에서 병원의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에 대해 휘그적, 본질주의적, 초보적 실증주의라고 비판하는 이들은(Ferngren, 2009: 126) 병원과 일반 구빈기관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그 출발점을 흐리고 따라서 병원의 기원을 찾는 작업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병원은 의학적 치료를 위해 특화된 사회적 제도이다. 따라서 의학적 치료가 부재하거나 강조되지 않는 기관을 구태여 병원의 기원으로 삼을 이유는 없다. 만약 일반적인 구빈 기관에서 병원이 분화되어 나왔다면 질병의 치료가 주된 기능으로 등장하는 순간을 병원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병원의 개념이나 기원에 대해 위와 같이 이견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병원의 기원을 기독교의 자선 전통 내에서 찾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병원의 발전 과정에서 이후 중세기에 나타나는 것처럼 교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원에서 병원이 순수하게 기독교적 전통 내에서만 생겨난 기관인가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펀그렌은 헬레니즘 시대 지중해 연안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아스클레피오스 숭배가 기독교의 치유 사역과 병원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는 에델슈타인의 주장(Edelstein, 1998: II 176)을 강하게 거부한다. 그는 기독교의 치유는 주변 다른 종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지만(Ferngren, 2009: 137),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다소 억지스럽다. 예를 들어 아스클레피오스 사원에서는 환자들이 일시적으로만 머물렀지만 기독교 전통의 병원에서는 보다 장기간 머물렀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출토된 비문에는 치유에 성공한 사례만 나오지만 실제로는 별로 효과가 없었을 것인 반면, 교회는 지속적인 돌봄과 치료를 제공해 환자가 더욱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이다(Ferngren, 2009: 138).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사례들의 진실 여부와는 별도로 그것이 기독교적 치유 활동이 아스클레피오스의 치유 활동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양자 사이의 관계를 부인하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의 주장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앙을 격렬히 비난한 초기 교부의 그것을 닮아 보인다. 더구나 기독교 내부에서만 병원의 기원을 찾을 경우 서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종교적 자선의 전통이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왜 그것이 기독교에서 병원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발전할 수 있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또 같은 기독교 세계 내에서도 왜 서로마가 아닌 비잔틴 제국에서였는지에 대한 설명 역시 어려움에 봉착한다. 이러한 문제는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를 고려해야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3. 치유신 아스클레피오스

의신(醫神)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잘 알려진 신들과는 계보를 달리한다. 제우스나 아폴로와 같은 신들은 그 기원이 분명치 않으며, 역사에 등장하는 시점부터 이미 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반면 아스클레피오스는 처음 영웅으로 등장했다가 후에 신의 반열에 오르는 역사적 과정을 거친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호머의 『일리아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거기서 그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마카온과 포달리리우스 형제의 아버지인 왕으로 나온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신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420년 아스클레피오스가 에피다우로스에서 아테네로 도착함을 기록한 명문(銘文)에서이다. 기원전 5세기 초의 자료에도 여전히 그가 영웅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대개 기원전 5세기를 경과하며 영웅에서 신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Edelstein, 1998: 66). 신으로서 아스클레피오스는 올림푸스에 속한 신이 아니라 지하세계에 속한 신으로 묘사된다. 신으로서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한 숭배는 테살리아의 트리카에서 처음 시작되어 인근 나라들로 점차 퍼져가서 에피다우로스를 거쳐 마침내 아테네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중심지인 아테네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아스클레피오스는 이후 그 여세를 몰아 그리스 전역으로 퍼져 범 그리스적 신으로서 숭배될 수 있었다.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는 처음부터 그를 위한 별도의 사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처음에 아테네에 왔을 때에는 엘레우시스의 사원에서 같이 모셔지다가 별도의 독자적인 사원이 마련되었다(Edelstein, 1998: I 127). 현재 남아 있는 대표적인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의 유적은 아테네와 에피다우로스, 그리고 페르가몬에 있으며, 이들은 고대에 아스클레피오스 숭배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5세기부터 시작된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는 점차 인기를 얻어서 후에는 그리스의 다른 모든 신들을 제치고 그리스 민중들에게 가장 널리 숭배되고 인기 있는 신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처음에는 신들의 반열에 끼지도 못하던 아스클레피오스가 올림푸스의 다른 모든 쟁쟁한 신들을 물리치고 가장 인기 있는 신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치유의 신으로 그 기능이 특화된 아스클레피오스가 당대 민중들의 필요성에 가장 잘 부합하는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아스클레피오스 숭배가 시작되는 기원전 5세기는 기존의 폴리스적 안정성이 깨어지고, 페르시아와의 대규모 전쟁, 그에 따른 역병의 유행 등으로 그리스 사회 전체가 큰 격변을 겪는 시대이며, 그 신앙의 융성은 알렉산더의 등장으로 인해 그리스가 제국으로 재편되는 과정과 같이 한다. 도시국가에서 정치적인 자유를 누리는 시민으로서 국가 운영에 참여하며 공적 영역에 관심을 갖던 시민들이 제국의 성립 이후 황제의 일개 신민의 지위로 떨어진다. 따라서 관심의 영역이 공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안위와 건강의 문제로 축소된다. 이처럼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소시민화가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를 활성화시킨 한 요인이라고 보기도 한다(Edelstein, 1998: II 123).
다음으로는 실제 신전에서 치유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치유를 원하는 환자는 신전에서 치유가 이루어지는 장소인 아바톤으로 들어간다. 이때 환자는 간단한 목욕재계는 하나 다른 번거로운 의례적 절차를 수행하지는 않았다. 아바톤에 들어간 환자는 꿈에 아스클레피오스 신이 나타나 치유해주기를 기대하며 잠자리에 든다. 환자의 꿈에 나타난 아스클레피오스는 수술이나 투약과 같은 구체적인 의료행위를 통해 환자를 치료한 것으로 여러 증언들이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의료적 행위 이외에 환자의 몸에 손을 대거나 입맞춤을 해서 치료하기도 했다. 그밖에 섭생법에 대한 처방이나 운동, 온천이나 바다에서 목욕할 것 등을 주문하기도 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치유가 단순히 신의 초자연적 능력에 의한 기적 치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의료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아마도 아스클레피오스가 단순히 치유의 신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의사들의 수호신이기도 하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환자가 아바톤에 들어가 잠을 자며 꿈에 아스클레피오스로부터 치유를 받는 이 일련의 과정을 ‘인큐베이션’, 즉 ‘몽중신유(夢中神癒)’라 한다[1]. 이런 과정을 통해 치유 받은 환자는 감사의 표시로 자신이 치유를 받은 신체 부위의 테라코타인 ‘이아마타(iamata)’를 만들어 바치고, 또 자신이 치유 받은 이야기를 새긴 비석을 신전의 마당에 세우기도 했다[2]. 참고로 한 사례만 인용해보겠다.
  • 에피다우로스에 사는 팜파에스는 입안에 종양으로 헐은 상처(phagedainan)가 있었다. 이 남자는 여기서 자며 환상을 보았다. 신[아스클레피오스]이 자신의 손으로 입을 열어 상처를 끄집어내고 씻어주자 이로부터 그는 나았다(Herzog, 1931: 92).

이렇게 기록된 치유 사례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는 다소 까다로운 문제이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종교적인 기적사화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한편에서는 이를 가능한 합리적 방식으로 설명해보려 시도하기도 하고, 또 다른 편에서는 이를 종교적인 담론으로 이해해야지 여기에 과학성이나 사실성의 잣대를 들이대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3]. 여기서는 이 치유 사례들의 사실성 여부를 따지거나 설명하려 시도하기보다는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 맥락과 특히 후에 기독교와 가지는 관계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실제로 이들 치료 사례 중 중 일부는 후에 기독교에서 차용되기도 하는 것을 볼 때(Festugière, 1975:224-227), 기독교에서는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치유자 예수와 초기 기독교

예수의 등장 무렵 아스클레피오스 숭배 신앙은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특히 아스클레피오스 숭배 신앙이 로마에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그것은 곧 로마 제국의 판도 내로 널리 퍼져갔다. 로마에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291년으로 당시 로마에 크게 유행하던 전염병을 해결하기 위해 수입한 것이 시초이다. 그리고 아스클레피오스는 로마인들이 수입한 외래의 신들 가운데 최초의 신이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앙은 로마 군인들을 통해 널리 퍼졌다. 로마 군인들이 로마의 점령지나 속주들로 이동하면서 아스클레피오스를 함께 가져갔던 것이다.
한편 예수는 로마 지배 하의 팔레스타인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사역에서 치유는 핵심적인 부분을 이룬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기적 사화들 가운데 치유 사화는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치유 사화는 모두 50건으로 마태복음이 18개, 마가복음이 15개, 누가복음이 17개이다. 여기에 단편적인 삽화로 포함된 치유 사화 46개, 예수의 제자에 의한 치유사례 19개를 합하면 115개에 이르는 많은 수의 치유사화가 복음서에 등장한다. 그리고 치유에 초점을 맞춘 예수의 종교적 활동은 예수의 사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도 계승된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틀을 벗어나 이방인들을 향하면서 신흥 종교인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을 벗어나 로마 제국의 영토 내로 퍼져간다. 특히 초기에 기독교가 포교되었던 헬레니즘 도시들은 대개 아스클레피오스 숭배가 활발한 곳이었다. 기독교의 포교 과정에서 질병 치유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으므로, 이는 필연적으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치유 활동과 경쟁관계를 이루게 된다(山形孝夫, 1976: 152-162). 물론 기독교의 초기 전파 과정에서 그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다양한 헬레니즘 종교들과 경합을 벌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2, 3세기에는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뿐 아니라 여러 지역을 편력하며 소위 기적을 행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Kee, 1986: 85). 이들 역시 기독교의 잠재적인 경쟁자였다. 그렇지만 일부 초기 교부들이[4]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해 유독 격렬한 비난을 한 것은 단순히 유일신 전통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방신 숭배라는 차원을 넘어 치유라는, 초기 기독교의 핵심적인 활동에서 경쟁관계를 이루었기 때문이다(山形孝夫, 1981: 247).
초기 기독교를 치유종교로 규정하고, 치료자로서 예수와 아스클레피오스의 경쟁관계에 처음으로 주목한 학자는 20세기 초의 저명한 교리사학자 하르낙이었다. 그는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이기 이전에 치유의 종교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예수도 자신을 의사로 제시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von Harnack, 1924: 129-150).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마태복음, 9장 10절).” 또한 초기 교회사 저술로 유명한 3세기의 교부 에우세비오스도 예수를 “구세주이자 의사(sōtēr kai iatros)[5]”로 표현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구세주의 의미로 사용하는 ‘sōtēr’란 단어 자체에 ‘질병으로부터 지켜주는 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도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를 어떤 존재로 바라보았는가를 알려주는 단서라고 볼 수 있다.
초기 기독교는 아스클레피오스를 자신들 치유활동의 경쟁자로 여겨 비난하고 배척했지만 치유활동의 양상 자체만을 본다면 유사한 점이 많다. 원래 아스클레피오스는 정주(定住)하는 신이 아니라 편력(遍歷)하는 신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항상 지팡이를 가진 모습으로 등장하며, 지팡이는 그의 편력을 상징한다. 그 지팡이를 뱀이 휘감고 있는데 이제까지 사람들은 대부분 이 뱀에 주목했다. 뱀이 치유와 관련해 가지는 상징성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론들이 제출되었으나 정작 지팡이가 가지는 의미에는 소홀했다. 사실은 뱀이 아니라 지팡이야말로 아스클레피오스의 활동 양식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물이다. 후대에 와서 아스클레피오스만을 모시는 사원이 따로 생기기는 했으나 초기 상당 기간 그를 모시는 별도의 신전이 없었던 이유는 그가 한곳에 머무르는 신이 아니라, 마을에서 마을로, 도시에서 도시로 떠돌아다니며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편력의 생활을 하는 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아스클레피오스의 모습은 사실 고대 그리스 의사들의 일반적인 활동 모습이었다. 이웃 나라 이집트의 의사들이 신전에 소속되어 정주하며 의료활동을 한 것에 비해 그리스의 의사들은 이 도시와 저 도시를 떠돌아다니는 편력의사로 활동했다. 물론 일부 도시국가에서는 좀 더 안정적으로 도시민들에게 의료를 제공하기 위해 공의(公醫)를 두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예외적인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의 의사들은 편력의(遍歷醫)로 활동했다. 『히포크라테스 전집』 가운데 대표적인 글의 하나인 『공기, 물, 장소에 관하여』[6]는 바로 이런 편력의사들을 위해 저술된 것이다. 이처럼 편력하는 그리스 의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그대로 투영되어 아스클레피오스 역시 지팡이를 짚고 각지를 편력하는 신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활동 양상 또한 아스클레피오스와 다르지 않았다. 특히 예수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마태복음, 8장 20절)라고 한탄할 정도로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그의 공생애(公生涯) 기간 동안 계속 했다. 예수의 전형적인 활동 모습을 마가복음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여러 촌락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다가…(마가복음, 6장 7절).” 또한 예수는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편력의 생활을 요구했다. 스스로 선택한 12명의 제자들을 내보내며 예수는 지팡이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도록 명령했다. 제자들은 그렇게 세상에 나아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치며 마귀들을 쫓아내고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주었다(마가복음, 6장 7-13절).
치유에 초점을 맞춘 예수의 이러한 활동은 당시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사실 기독교의 출현 당시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일부, 혹은 일파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치유활동을 중심에 두고 편력의 생활을 한 예수의 활동 모습은 당시 유대교의 어떤 분파와도 닮지 않았다. 당시 유대교는 서로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몇 개의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먼저 사두개파는 최고 특권층으로 주로 예루살렘 성전에 봉직하던 성직자들의 그룹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가 특권층의 행태에 불만을 갖고 분리되었다. 에세네파라 하는 이들은 광야로 나가 수도원 생활을 하며 금욕과 고행의 생활을 했다. 이들과는 별도로 일상생활에서 율법의 준수를 중요시했던 이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로마에 저항하는 무장활동을 벌이며 일반인들에게 더욱 엄격하게 율법의 준수를 요구했던 젤롯당이 있었다(트로크메, 2016: 18-21).
이들 분파들은 율법에 대한 태도나 종교적 입장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나 예수와 같이 치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분파는 없었다. 다만 광야에서 집단적으로 금욕적 생활을 했던 에세네파의 경우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으면 이들을 돌보는 공간을 마련한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와 같은 공동생활을 하는 집단 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환자들을 돌보기 위한 공간이었을 뿐 이 공간의 존재가 특별히 그들이 질병치유에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이들뿐 아니라 예수의 선구자로 언급되는 세례요한 역시 회개를 외친 것으로 나타나지만 치유활동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치유활동에 대한 유대교의 입장은 유대교 성전의 역할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성전이 치유와 관련된 공간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는가의 문제이다. 병원의 가장 큰 특징은 환자의 치료에 특화된 별도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사실 질병의 치유와 건강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에서도 공통된 주요 관심사이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적 자선의 전통에서 병원이 생겨났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다. 이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기 이전에 먼저 종교적 사원이 질병 치유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적 사원은 치유 활동과 관련해 세 가지 유형의 장소로서 역할을 한다. 첫 번째는 질병 치유를 위한 청원 기도의 장소이고, 두 번째는 실제로 질병의 치유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치유에 대한 감사의 기도, 혹은 의례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Avalos, 1995: 28-30). 여기서 사원이 청원 기도와 치유 후 감사 기도의 장소로서 기능을 하는 경우가 보다 일반적이며, 환자들에 대한 치유 행위가 이루어지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은 좀 독특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은 종교적 의례가 이루어지는 공간과 치유 공간, 그리고 환자들의 숙소가 따로 있었고 그밖에도 목욕탕, 노천극장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었다(Tomlinson, 1983: 41).
그런데 기독교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유대교의 경우, 성전은 상대적으로 좁았고 성소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제사장 그룹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성전이 청원 기도나 감사 기도의 장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치유가 일어나는 장소는 아니었다. 치유는 나아만의 경우와 같이(열왕기하, 5장 1-27절) 성전 바깥의 강과 같은 곳에서 이루어졌으며, 병자는 오히려 부정하다는 이유로 성전 출입이 제한되고 금지되었다(Avalos, 1995: 324). 그리고 유대교의 사제는 치료자가 아니라 질병의 유무를 확인하고, 질병이 나으면 더 이상(종교적으로) 부정하지 않음을 확인해주는 확인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레위기, 13장 1절 이하). 유대교의 회당(synagogue) 또한 사람들이 모여 신의 말씀을 듣는 공간이지 치료 공간은 아니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치유 활동이 종교적 활동의 핵심에 자리잡게 된 것은 유대교의 영향이 아닌 당시 헬레니즘 사회에 널리 퍼져있던 아스클레피오스를 포함한 다양한 치유신에 대한 신앙의 영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특히 사원이 환자들이 질병 치유를 위해 몰려드는 공간이 된 것은 기독교적 병원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볼 수 있다. 환자의 치유를 두고 경쟁 관계에 있던 기독교로서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과 같이 환자들을 수용할 공간이 필요함을 느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5. 병원 탄생의 배경

다음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왜 같은 기독교 세계 내에서도 병원이 비잔틴 제국 내에 처음으로 세워졌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라틴어를 사용하는 로마와 희랍어를 사용하는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의학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 의학이 발생한 고대 그리스와는 달리 로마에서는 의학이 별도의 영역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로마 사회에서는 의사도 존재하지 않았다. 환자는 로마의 대가족 내에서 경험 많은 연장자 가족구성원(pater familias)에 의해 치료되거나 돌봄을 받았고, 그리스처럼 별도의 전문직으로 의사는 존재하지 않았다(Scarborough, 1976: 19). 전통적으로 환자를 돌보는 것은 의사가 아니라 가족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다만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의학 역시 로마에 수입되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에게 의학은 곧 그리스적인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대해 이중적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 의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에 대해 가지는 일종의 반감은 초기 기독교에서 라틴 교부들이 그리스 문화에 대해 가지는 태도에도 반영된다. 로마인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라틴 교부들에게도 의학은 그리스적인 것이었고, 그것은 곧 이교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로마가 지배하는 헬레니즘화된 소아시아 일대에는 이전부터 아스클레피오스 숭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교의 치유신인 아스클레피오스뿐 아니라 의학 자체를 격렬하게 비난한 사람들이 테르툴리아누스, 락탄티누스, 아르노비우스 등 대부분 라틴 교부라는 사실은 그래서 흥미롭다. 일단 기독교의 입장에서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는 이교신에 대한 숭배이므로 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비판의 언사들이 상당히 격렬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아스클레피오스를 “위험한 짐승(periculosam bestiam)[7]”, 아르노비우스는 “뱀의 화신[8]”, 락탄티우스는 “악령의 우두머리(daemoniarches)”라 불렀다[9]. 그리고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한 신앙 자체를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고 경멸하는 태도를 취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가장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는 소크라테스는 죽음 직전에 친구에게 자신을 대신해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닭 한 마리를 바쳐달라고 부탁했다. 락탄티우스는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심판을 받을까 두려워 그렇게 한 것이라며 소크라테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조롱했다[10].
라틴 교부들은 이교신인 아스클레피오스뿐 아니라 의학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대표적이고, 동방교부로 분류되는 타티아누스는 비록 희랍어로 글을 썼으나 로마에서 공부를 하고 시리아로 가서 금욕주의적 분파를 만들었다. 그는 특히 약물의 사용을 비판했다[11]. 약물에 대한 그의 부정적 태도는 의학 전반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약물이라는 물질에 주술성이나 신성을 부여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라고 그 의미를 제한하는 학자도 있다(Amundsen, 1992: 377-391). 그러나 어쨌든 의학의 가장 중요한 치료수단의 하나인 약물에 대한 비판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의학에 대한 부정적 태도의 일부를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르노비우스는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 에피다우로스에서 커다란 뱀의 무리 이외에 무엇이 왔는가?…당신이 찬양하는 아스클레피오스, 즉 위대하고 존귀한 신, 건강을 주는 자이며 질병을 피하고 예방하고 파괴하는 신은 뱀의 형상에 갇혀서, 진흙에서 태어난 벌레와 같이 땅바닥을 기어다니며, 꾸불꾸불 또아리를 틀며 자신을 끌어당기고 뺨과 가슴으로 땅을 문지른다[12].

아르노비우스가 이처럼 비판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성서에서 뱀은 인류의 타락을 부추긴 대표적인 악한 동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에서 뱀이 반드시 악의 상징으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민수기(21장 4-9절)에서 구리뱀은 뱀에 물린 사람을 치료하는 상징물로 등장한다. 물론 여기에는 뱀에 물린 것은 뱀에 의해 치료된다는 유감주술적 관념도 관련되지만 어쨌든 뱀이 치유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아르노비우스는 아스클레피오스를 단순히 치유신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세속 의학의 대표자로 본다. 그는 아스클레피오스가 약초의 용도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13]. 따라서 이제 아르노비우스의 비판은 아스클레피오스가 대표하는 세속의 의학, 혹은 의사들로 향한다. 그에 따르면 의사는 지상의 피조물(animal humi natum)일 따름이다. 따라서 그들이 가진 지식, 즉 의학은 약이 없이도 치료할 수 있는 신의 능력에 의존하는 참된 지식(scientiae veritate)이 아니다. 세상의 의학은 의심스럽고(suspicabili) 추론(coniecturarum)에 의거한 불완전한 지식이기 때문이다[14].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아르노비우스가 약물이 효과가 없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는 말씀과 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 질병을 치료하지만, 의사는 예수처럼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약물의 힘, 다시 말해 외부의 힘을 빌려 환자를 치료한다는 점이 그가 의사를 비판하는 주안점이 된다. 아르노비우스의 논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 오로지 자신의 능력에 의해 환자를 치료하지만 아스클레피오스는 자신이 아니라 약물의 능력을 빌려 환자를 치료한다. 그 점에서 아스클레피오스는 예수보다 열등하고, 신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약이라는 외부 물질의 힘의 빌리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지 신의 영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라틴 교부였던 락탄티우스는 아스클레피오스는 육체의 질병만을 치료하지만 예수는 귀신들림도 치료한다는 점에서 예수의 우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15].
이처럼 의학에 비판적이었던 라틴 교부들에 비해 희랍교부들은 대체로 의학에 호의적이었다. 기본적으로 헬레니즘 문화의 세례를 받은 희랍교부들은 철학을 비롯한 그리스의 문화적 유산을 기독교의 교리와 조화시키려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희랍교부를 대표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그리고 최초의 병원을 만들었던 바실레이오스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들은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이 이교신을 배척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수를 아스클레피오스와 동일시하려는 경향마저 보였다. 예를 들어 유스티누스는 예수와 아스클레피오스가 동일하게 치유의 신이며, 그들의 활동은 동일함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들이 그(예수)가 앉은뱅이와 중풍환자와 선천적으로 박약한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가 행했다고 말해지는 것과 유사하거나 혹은 완전히 동일한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16].

유스티누스가 이처럼 자발적으로 예수와 아스클레피오스를 동일시하고자 한 것은 당시(2세기 중반) 기독교가 처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기독교 공인 이전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에서 박해를 받았다. 박해의 이유는 다양했다. 기독교인들은 범죄 집단처럼 취급받기도 했고, 이상한 사교집단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에 대해 유스티누스는 기독교인들이 결코 범죄집단도 사교집단도 아니며 의롭고 충성스럽고 경건한 로마의 신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박해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캄펜하우젠, 1984: 24-25). 그런 맥락에서 기독교인들이 섬기는 예수는 이상한 신이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판도 내에서 널리 신앙되고 있던 아스클레피오스와 동일하게 질병을 치료하는 건전한 신이라는 점을 위의 인용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호교적 목적 이외에도 플라톤을 예수의 선구자로 보고, 이성을 따랐던 사람은 누구나,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나 헤라클레이토스도 모두 그리스도인이었다고[17] 본 유스티누스의 견해를 고려한다면 그가 예수와 아스클레피오스를 동일 선상에서 제시한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일부 라틴교부들이 사갈처럼 보았던 아스클레피오스를 예수의 선구자로, 그리고 예수를 완성자로 보며 이들의 가르침 사이에 연속성을 본다. 에피다우로스에 있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향기가 득한 신전 안에 들어오는 자는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거룩한 것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클레멘스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 내용을 예수가 했던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장 3절)”는 말과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곳[천국]에서는 신의 성전이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개의 토대 위에 세워져있기 때문이다[18].” 즉 클레멘스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과 천국의 신전을 동일선상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지상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천국에서 완성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병원의 창설자로 간주되는 바실레이오스는 의학은 병든 이들을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수단이므로 그것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도움이 된다면 세속 의학을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19]. 그 자신 아테네에서 공부할 때 의학의 이론을 공부한 바 있었던 것도(Temkin, 1991: 176) 그가 의학에 대해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던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 이래 철학자가 전문적인 의료활동을 하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탐구의 일부로서 인체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바실레이오스도 이러한 지적 전통 속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알기 위한 철학의 기초로서 의학, 특히 해부학을 공부한 것을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20]. 실제로 그는 눈의 내부 구조와 그 주변 기관에 대해 꽤나 자세한 언급을 남기고 있다[21]. 따라서 의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바실레이오스에 의해 최초의 병원이 만들어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같은 기독교 세계 안에서도 비잔틴 제국에서 최초의 병원을 비롯하여 이후에도 많은 병원이 생겨났던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라틴 교부들과는 달리 희랍교부들이 의학에 호의적이었던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 덕분에 병원이 단순히 구빈시설이 아니라 의학적 치료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제도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환자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아스클레피오스 사원의 존재였다. 초창기 질병치유의 종교로서 시작해 세력을 확장해가던 기독교는 치유라는 점에서 아스클레피오스 신앙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사원에 상당하는 시설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병원으로 발전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공인되고 세력을 얻은 후에는 교회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과 그 부대시설을 구빈원이나 병원의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Edelstein, 1998: II 176).
여기에 더해 병원이 기본적으로 자선시설이라고 할 때 로마와 비잔틴 세계에서 자선을 실천하는 관행의 차이도 비잔틴 세계에서 병원이 생겨나 발전하게 된 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로마 사회에서는 빈자들의 건강을 위한 기부나 자선은 병원의 건설이 아니라 공중목욕탕, 체육시설, 수도교 건설 등과 같은 보건위생과 관련된 사회 기반 시설의 건설을 목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Hands, 1968: 141).

6. 맺음말

병원의 역사는 의학사의 중요한 연구 주제이다. 각 시대와 지역에 존재했던,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개별 병원의 역사를 정리하고, 그 병원들이 해당 지역에서 수행했던 사회적 역할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은 계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병원은 사회적 제도이다. 모든 사회적 제도가 그러하듯 병원 역시 태초부터 존재해온 무엇이 아니라 인류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등장한 역사적 산물이다. 현대 사회에서 병원이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할 때, 개별 병원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넘어서 병원이란 제도의 이념형과 더불어 그것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병원이란 제도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데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간 병원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영역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기독교 전통의 비잔틴 세계에서 병원의 기원을 찾는 작업이다. 사실 병원의 기원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는 이 영역에 집중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영역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앙과 그 신전에 대한 연구이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대한 연구는 ‘일종의’ 병원, 혹은 그의 전 단계에 해당하는 기관이라는 유보적 판단 아래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를 병원의 기원으로 적극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보다는 신전 자체의 물리적 구성, 신전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에 대한 분석, 그곳에서 이루어진 치유활동의 재구성 등이 그 주요한 연구주제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처럼 개별적으로 존재해온 두 개의 영역을 하나로 연결시켜 병원의 기원을 탐구하고자 했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무엇을 병원의 기원으로 볼 것이냐가 아니라 어떤 종교적·사회적 배경에서 병원이 등장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병원의 물리적 기원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였으나 그것이 성립가능했던 배경으로 기독교만을 언급하는 기존의 시각을 벗어나 아스클레피오스 신앙과의 관련성을 주장했다. 흔히 병원의 기원으로 언급되는 기관들은 일반적으로 초창기에는 일종의 구호 기관으로서 병자들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 나그네 등 광범위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은 처음부터 그 대상을 “병든 사람”으로 분명히 했고, 그 점에 있어 병원의 정의에 부합하는 면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병원 설립과 관련해 라틴 세계와 비잔틴 세계 사이에 나타난 차이를 두 문화권이 가진 의학에 대한 기본적 태도의 차이로 설명하고자 했다. 물론 그를 위해 이 논문에서 제시한 증거들이 양자를 연결시키는 고리로서는 아직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병원의 탄생 배경에 대한 새로운 설명으로서는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며, 그 연결고리를 더욱 튼튼하게 만드는 것은 추후의 과제가 될 것이다.

Notes

1) 인큐베이션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자는 것만을 말하지는 않으며, 일반적으로 신전에서 자는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다. Mary Hamilton, Incubation or the Cure of Disease in Pagan Temple and Christian Churches, W. C. Henderson & Sons, 1906.

2) 특히 에피아우로스의 신전 유적에서 이런 비문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Rudolf Herzog, Die Wunderheilungen von Epidauros, Philologus, Supplementband XXII, Heft III, Dieterich’sche Verlagsbuchhandlung, 1931; Lynn R. LiDonnici, The Epidaurian Miracle Inscriptions - Text, Translation, and Commentary, Scholars Press, 1995.

3) 시대별로 치유 사례들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는 다음에 잘 정리되어 있다. Edelstein, ibid., pp. 142-145.

4) 초기 교부들의 의학에 대한 태도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가 된다. Darrel W. Amundsen, Medicine and faith in early Christianity“, Bulletin of The History of Medicine 56: 326-350, 1982.

5) Eusebius Caesariensis, Demonstratio evangelica, IV. 10. 17.

6) 여인석·이기백 번역, ‘공기, 물, 장소에 관하여’ 『히포크라테스 선집』, 나남. 2010.

7) Tertullianus, Ad Nationes, II, 14.

8) Arnobius, Adversus Gentes, VII, 44-48.

9) Lactantius, Divinae Institutiones, II, 16, 11.

10) Lactantius, Institutionum Epitoma, 32, 4-5.

11) Tatianus, Ad Graecos, 18.

12) Arnobius, Adversus Gentes VII, 44.

13) Arnobius, Adversus Gentes I, 38.

14) Arnobius, Adversus Gentes, I, 48; III, 23.

15) Lactantius, Divinae Institutiones, IV, 27, 12

16) Justinus, Apologia 1, 22.

17) Justinus, Apologia 1, 46.

18) Clemens, Stromateis, V, 1, 13.

19) Basilisus Magnus, Interrogatio, 55.

20) Basilius Magnus, Homilies I.2.

21) Basilius Magnus, De Hominis Structura Oratio II. 14, 15.

References

여 인석·이 기백, eds. 『히포크라테스 선집』 (서울: 나남, 2010).

Arnobius, Adversus Gentes, I, 48, III, 23 Patrologia Latina 5. col. pp. 779-780.

Arnobius, Adversus Gentes, VII, 44-48 Patrologia Latina 5. col. pp. 1282-1285.

Basilius Magnus, Homilies I.2 Patrologia Graeca 29. col. 8.

Basilius Magnus, De Hominis Structura Oratio II. 14, 15 Patrologia Graeca 30. col. pp. 60-62.

Clementis Alexandriani, Stromateis, V, 1, 13 Patrologia Graeca 9. col.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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